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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은 낭만의 고장
김해·강진은 사상의 배태지…
84명의 필자가 국내외 80여곳 돌아 엮어 16세기 관찬 <동국여지승람>, 이중환의 <택리지>, <한국의 발견>(전 11권)(1988) 등의 맥을 잇는 것으로 평가받는 <문학지리·한국인의 심상공간>(논형 펴냄)이 나왔다. 상중하 세 권, 자그마치 1400여쪽 분량. 동국대 김태준(국문학과) 교수의 정년 기념으로 나온 이 책은 이혜순(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를 포함해 84명의 필자가 국내 50곳, 국외 28곳의 문학지리를 문헌 고증 및 현지 답사를 거쳐 엮었다. 집필자 대부분 국문학 전공자들이나 일부 지리학(이은숙, 김종혁) 사회학(조은) 전공자도 참여했다. 문학지리학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한 영역. 지리학이 지형, 지질, 식생, 기후 등을 중심으로 기술한다면 문학지리는 문학이 땅에 정서적, 심리적, 철학적, 미학적 숨결을 불어넣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따라서 그 땅에서 살다간 이름없는 민초와 스쳐 지나간 여행자들의 자취로서는 물론 시, 소설, 설화 등 문학작품 속의 공간으로서, 작가가 태어나 감수성을 키우며 성장한 공간으로서, 시와 소설을 낳은 문학창조의 공간으로서 말해진다. 궁극적으로 문학지리는 국문학, 지방문학, 비교문학이고 세분하면 기행문학, 유배문학, 이민문학, 여행자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서울은 조선조 창건 때부터 현대까지 600년 이상 권력과 부의 집합지였고 이것이 현재 행정수도 이전을 둘러싼 해당 지역 간의 심각한 대립을 일으킨 이유이지만, 문학지리의 관점에서 볼 때 서울은 그런 독점적인 지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서울은 벼슬을 바라던 사람들에게는 임이 계신 선계일 수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한테는 ‘티끌 세계’이고 ‘욕망의 도시’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개성은 황진이가 삼절을 자랑하고 <이생규장전>의 이생과 최랑의 사랑과 이별이 수놓아진 낭만의 고장, 김해나 강진은 이제 쓸쓸한 유배지가 아니라 학문과 사상의 배태지로 각인되고 있다. 이 책은 한국 지리를 한반도에 국한하지 않고 연변, 도쿄, 러시아 서구까지 확장시킴으로서 기왕의 물리적인 지리개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공간적으로 국외에 속하지만 한국인의 심성에는 국내와 다름없이 익숙한 공간들을 한국인의 공간에 편입시켰다. 도쿄는 윤치호와 유길준을 시작으로 이광수, 최남선, 김동인, 이상 등이 유학하면서 꿈을 키우고 때로 절망하기도 했던 ‘근대 문학사의 창고’로 비유될 정도. 19세기 후반 굶주린 농민의 터전이 되었던 연변 역시 국권상실과 더불어 독립운동과 망향의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여 ‘선구자’, 윤동주, 김학철 등이 우뚝 서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뛰어난 점은 용궁, 무릉도원, 아리랑고개 등 한국인의 심상을 지배하는 추상적인 공간까지 아우르고 있는 것. 무릉도원은 외부와 격절되어 전쟁, 빈부격차, 갈등이 없는 중국기원의 이상향. <파한집> <몽유도원도> <청구야담> 등에서 보이는 한국적 변용을 알아보고 지리산 청학동, 상주 오복동 전설 등으로 구체화하고 있는 현상을 적시한다. 이번 <문학지리…>에 이어 논형은 별도로 지역별 시리즈 30~50권을 기획하고 있는데, 그 첫권으로 <종족집단의 경관과 장소>가 곧 나올 예정이라고 밝혔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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