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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7.05 17:08 수정 : 2005.07.05 17:08

“문학을 문학의 성에 가두었다”

“문학성이야말로 문학의 미래”

‘문학주의’라는 말이 있다. 문학의 문학다움 또는 문학 고유의 속성에 대한 옹호와 집착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 문학주의가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문학에서 문학다움을 옹호하는 것이 그릇된 일일 수는 없다. 문제는 문학주의의 이름 아래 무시되거나 배척 당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학주의를 비판하는 쪽의 주장에 따르면 그러하다. 그것을 현실이라고도 참여라고도 정치와 역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젊은 비평가들이 만드는 반년간지 <작가와 비평>(여름언덕) 제3호(2005년 상반기)는 ‘문학주의의 정체성과 그 위기’를 특집으로 마련해 문학주의의 공과를 따져 물었다. 편집동인인 이경수씨와 최강민씨가 문학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썼고, 동료 평론가 김미영씨는 반대로 문학주의 지지의 글을 보탰다.

이경수씨는 ‘문학주의의 계보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한국 근대문학의 태동기에 문학주의가 형성되고 그 이후 지배적 지위를 차지해 온 과정을 비판적으로 짚어 본 뒤 “문학을 문학 바깥의 삶으로부터 유리시켜 문학이라는 좁은 성에 가두려는 문학주의의 시도가 문학이 지닌 다채로운 변이와 생성의 동력을 잃어버리게 한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최강민씨는 ‘세기초 문학주의의 파탄과 비평의 위기’에서 잡지 <문학과 사회>와 <문학동네>를 중심으로 한 문학주의가 90년대 이후 당대 문학의 우세종이 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점검한다. 그는 특히 귀족적 장인정신을 강조한 <문학과 사회>의 ‘엘리트적 문학주의’가 상대적으로 작가와 작품을 강조하며 90년대 작가의 발굴에 공을 들였던 <문학동네>의 ‘대중적 문학주의’에 헤게모니를 넘겨주는 과정으로 이 시기 한국 문단의 지형도를 파악하고, <문학동네>의 문학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공력을 기울인다.

%%990002%%최씨는 <문학동네>식 문학주의가 다른 무엇에 우선해서 작품을 존중한다는 ‘텍스트주의’를 표방했음에도 “실상 주인 노릇을 했던 것은 평론가였다”고 지적한다. 작품 자체의 의미와 가치에만 충실하겠다는 자세는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를 포기하는 ‘무뇌아적 텍스트주의’로 나타나며, 이것은 출판자본의 상업주의에 복무하는 주례사비평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문학의 자율성이라는 환상은 반성의 거울도 함께 추방하였기에 오류를 자체적으로 수정할 가능성마저 원천봉쇄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이들과는 반대로 김미영씨는 ‘문학성은 문학의 미래다’라는 글에서 “‘문학주의’의 본질은 문학성의 옹호에 있지, 문학의 사회적 실천력의 부정에 있지 않다”는 말로 문학주의를 지지한다.

최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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