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06 18:50 수정 : 2005.07.06 18:50

궁중 발레에세 여성역은 소년이 맡아

고전 발레의 미덕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은 모던 발레와 정반대의 관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률적인 의상에 일률적인 무대, 그리고 대체로 일률적인 안무. 그 안에서 관객들은 무용수들이 얼마나 체격이 타고났으며, 그 타고난 체격으로 얼마나 정확하게 테크닉을 구사하고, 그 테크닉 안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내면을 표현하는가를 평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을 구사하며 공연을 이끌어가는 주축은 군무든 주역이든 발레리나, 즉 여성이다.

이처럼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위해 창조된 예술인 듯 보이는 발레는, 실상 여성에게 금지된 예술이었다. 그 기원은 16세기 프랑스 왕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곳은 발레가 최초로 탄생한 무대이기도 하다. 권력의 중심부에서 탄생한 육체의 예술은 당연히 단순한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목적이 선행되었다. 주로 그리스 고전을 줄거리로 삼은 초창기 발레에는 궁중의 정치적 상황들이 암시되었으며 귀족들은 그 의미를 쉽게 파악하고 몸을 사렸던 것이다.

루이 14세는 예술을 정치적으로 탁월하게 이용할 줄 아는 전략가였다. 발레 애호가였던 그는 대중선전의 한 방법으로 스스로 발레리노가 되어 초창기 약했던 자신의 정치적 지지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데 사용했다. 그가 발레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는 증거는 발레를 그만둔 시기에서 증명이 된다. 이는 1670년경으로, 태양왕으로서 전제왕권을 확립한 시기와 대략 일치한다.

목적은 순수하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왕이 춤춘 덕분에 발레는 흥할 수 있었다. 왕의 발레를 든든하게 받쳐줄 훌륭한 음악가(장 밥티스트 륄리)와 극작가(몰리에르)와 무용교사(피에르 보샹)가 태양왕 주변을 빙글빙글 공전하며 예술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그 와중에 궁정악장 륄리가 당시 지팡이나 다름없던 대단히 큰 지휘봉으로 자신의 발등을 찍어 파상풍으로 순직(?)하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턴아웃(무용수의 전면을 보여주기 위해 골반에서 발끝까지 하체를 바깥으로 열어주는 기법)을 위시한 보샹의 테크닉은 오늘날 정착한 고전 발레의 테크닉의 원조로 평가된다.

이러한 발레의 발전은 신체적 표현을 억압하던 중세 시절에 대한 반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보수를 낳는 법. 그리고 그 최초의 희생자는 언제나 여성이었다. 보샹에 의해 기교가 점점 다양해지고 또 그 표현을 위하여 의상이며 장신구가 간소화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는 이 몸의 예술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을 금지시키기에 이르렀다. 궁정발레에서는 간혹 귀족 부인들이 얼굴에 가면을 쓰고 춤을 추곤 했지만, 결국 여성 역은 소년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