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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신분·재력 과시 상징품으로 우리 눈에 작은 방울에 지나지 않는 연적의 물줄기를 고대 역사를 굽이치는 푸른 파도라고까지 호방하게 해석하면서 타인의 대한 배려까지 강조한 글이다. 일종의 호연지기인 셈인데, 정작 이 연적 자체는 작은 육각형 몸체 위에 기품있는 나비의 모습을 그려넣은 소담한 모양새를 띠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고려 문인 이규보는 더 나아가 <동국이상국집>에서 연적의 자태를 마치 신령스런 제기처럼 노래하고 있다. ‘꿈속에 옥병 하나 얻으니/녹색 광채 눈이 부셨네/ 두들기니 쟁하는 소리 나고/정밀하여 물도 담을 만한데/그 물을 벼루에 쏟으면/천폭의 시를 쓸 수 있었네/신기한 물건이 허깨비와 같고/하늘의 조화가 아이들 장난감도 같아/입을 오므렸을 때는/한방울 물도 없을 것 같다가/마치 신령스런 바위가 벌어져/파란 석수가 흘러나오는 듯하고/갑자기 다시 오므러들면/손가락 하나도 낄 수 없었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이용후생의 관점으로 연적을 색다르게 사유하고 있기도 하다. ‘종이와 벼루는 농토이고, 붓과 먹은 쟁기와 호미이며, 문자는 씨앗이고, 글쓰는 이의 뜻은 농부, 연적은 관개 수로’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글밭을 갈고 닦는 데 있어 물길을 대는 인프라 구실을 한다는 얘기다. 이처럼 조선시대 선인들은 모두 연적의 모양새가 지닌 특징과 기능적 쓰임새를 중심으로 글들을 남겼으나 조선 후기의 길목인 17세기 이후 도자문화의 발달로 다양한 모양의 연적들이 생산되고, 골동품 애호 풍조도 나타면서 연적은 문화적 교양이나 계층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상징물로 변한다. 복숭아, 용·기린·두꺼비 등의 동물 문양이나 산수의 풍경을 형상화한 기기묘묘한 모양의 고급 백자 연적들이 줄이어 주문 생산되는데, 재복을 가져다주는 두꺼비나 학, 용 무늬 등이 특히 선호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연적 명품으로 전하는 국립중앙박물관 수정 박병래 기념실 소장의 백자 용 구름 무늬 연적이나 두꺼비 모양 연적, 백자 쌍학 무늬 연적들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들이다. 연적에 대한 선비들의 시선은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존에 만들어진 공예품 가운데서 취향에 맞는 것을 고르는 것이었기 때문에 글 도구와 완상용이라는 기능적 요소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연적에 곧장 투영하거나 조선 후기 다채로와진 연적의 조형적 아름다움 자체를 평하는 글들은 그다지 많이 띄지 않는다. 방병선 고려대 교수는 “스스로가 창작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골라 사들이는 성격이었으므로 상업문화가 발달하는 18세기 이후 중인, 양반층 사이에 신분, 재력을 과시하는 상징품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고 말한다. 19세기 이후 일본 중국 도자기 유입으로 도자 생산이 쇠퇴하자 전통 연적은 물밀 듯 들어온 중국 골동 연적에 자리를 내주고 시장 구석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월북한 미술사가 김용준이 <근원수필>에서 덮어놓고 사들여 보았다고 털어놓은, 바보같은 두꺼비 연적도 그런 것이었으리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못생긴 눈, 그 못생긴 코, 못생긴 입이며 다리며 몸뚱어리들을 보고 무슨 이유로 너를 사랑하는지 아느냐. 거기에는 오직 하나의 커다란 이유가 있다. 나는 고독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독함은 너 같은 성격이 아니고서는 위로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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