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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터럭 꼿꼿한 붓대
선비들 정신세계 투영하는 거울과도 같아
‘뾰족한 옥처럼 생긴 네 모습/꼿꼿한 절조 한림 속에 뛰어났네…’
‘하늘이 무슨 물건 그려 내려고/먼저 목필화부터 내어보내…시가의 뜨락에 심도록 했나’
고려시대 문사 이규보가 읊은 이 한시는 붓에 대한 선비들의 지극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싯귀 중에 나오는 목필화는 붓의 모양을 꽃에 비유해 붙인 별명인데, 시가 생산되는 지성의 뜨락에서 붓은 하늘이 내려준 꽃과 같은 존재임을 암시한다.
고대 중국의 은, 주대에 발명된 것으로 추정되는 붓은 이처럼 시대를 초월해 당대 선비 지식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애장품 1호였다. 특히 중세 이후 중국과 조선을 지배했던 성리학 사상이 현실 정치에 참여해 세상을 구하는 것을 명분 삼은 이상 글을 통해 과거에 응하고 상소하고, 정론을 펼치는 것은 선비들의 의무와 같은 것이었으며, 이런 과정에서 문방구 핵심인 붓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투영하는 거울 같은 구실을 하게 된다.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붓을 원래 도필이라하여 나무에 글씨를 새겨쓰던 칼을 대신해 나온 것이라고 하고 있다. 엄정하고 예리한 칼쓰는 법이 필법의 원형이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당나라의 한유 같은 문인들이 붓을 의인화해 제후의 이름인 ‘관성자’ 혹은 ‘관성후’라고 높여 불렀던 것이나 붓을 다 쓴 뒤 반드시 땅에 고이 묻었던 관습 등은 정신 문화유산으로서 붓의 품격을 짐작하게 한다. 문인 김종직이 경연관 시절 일본에서 건너온 붓을 하사받고 쓴 한시는 붓의 자태를 보는 사대부들의 겸허한 마음가짐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천 자루를 은홍으로 정교하게 꾸미었구려/빛나는 터럭은 흰 사슴에서 뽑았고/알록달록한 붓대는 붉은 나전으로 새겼네/천하에 문자 같이 쓰고 있음을 몸소 느끼겠으니… 미천한 신하가 진기한 걸 하사받았으나/글씨를 못쓰니 부끄러워 땀이 흠뻑 나는구나’
조선 붓은 중국인들도 천하 제일이라고 탐낼 정도로 품질을 자랑했다고 묵향의 기록들은 전한다. 기원전 1세기 원삼국 시대 유적인 경남 창원 다호리 무덤에서 나온 국내 최고의 칠기 붓 유물을 보면 원형 붓대 양쪽에 붓털이 달린 특이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나무로 깎은 붓대는 가운데와 양 끝에 하나씩의 작은 구멍을 뚫었는데, 붓털의 아랫쪽 끝을 실로 묶어 고정시키는 용도로 추정되어 당시 세공술이 상당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붓털은 여러 동물 털, 심지어 아기 털까지 쓸 수 있으나 족제비털인 황모와 쥐수염털, 토끼털을 최고로 쳤다. 특히 족제비털 붓은 조선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고려 때부터 명성이 높았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황모필은 팔도에서 공납받아 제작했으나 중국인들이 워낙 좋아해 중국에서 털 재료를 제공하고 조선에서 붓을 주문생산할 정도였다고까지 전한다. 실학자 이익은 족히 못마땅했던지 <성호사설>에서 이를 꼬집고 있다. “매양 중국 연경에서 족제비털을 사다가 붓을 만들어야만 붓이 좋다는 칭찬을 저들에게 받게 된다. 그런데 저들은 좋은 재료를 남에게 팔면서도 붓은 잘 만들어내지 못하니,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조선후기 들어서는 사치 풍조에 따라 붓털 뿐 아니라 붓대 자체도 호화 문양으로 조형적 감각을 뽐내는 유행이 생겨난다. 종이, 먹, 벼루는 옛 것일수록 좋다고 했으나 붓만은 새 것을 높이 쳤기 때문에 매화, 새 문양이나 용문양, 등용문 오르는 잉어상 등을 새긴 고급 붓대들이 등장했다. 심지어 금과 은, 수정·상아 등으로 붓대를 만들기도 했다. 호림박물관의 문방구 특별전에 나온 19세기 ‘수정제필’은 수정 몸통에 붓털 맨 고리부분을 흰 상아로 만들어 호사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붓 좋다고 좋은 글씨가 나오는 것은 아닌 법. 당대 명필들은 명품 지상주의를 비판하면서 내면적 수양과 혹독한 훈련이 좋은 글씨의 지름길이라고 한결같이 강조하곤 했다. 18세기 후반 명필 창암 이삼만이 생활고 속에서도 칡뿌리로 만든 갈필, 대나무를 잘게 쪼갠 죽필, 꾀꼬리털 붓 등의 붓털감을 개발하며 고유 서체 동국진체를 일궈낸 것은 그 좋은 반증이다. <논습자지필>이라는 글에서 그는 말한다. ‘세상에 글씨 익히는 사람들은 좋은 종이와 붓으로 늘 연습해야 한다고 한다… 이는 큰 폐해다. 옛 명필들은 나뭇잎, 물로 썼고, 혹 돌에 쓰고 방석에 쓰기도 하였으나 모두 명성을 전했다. 어찌 가난하다고 독서를 못하고 글씨를 쓰지 못할리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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