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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이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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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요석 같은 요염한 눈동자는 곧바로 나를 향해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쓰지 히토나리 18 나 왔어, 하고 칸나가 말했다. “하지만, 일에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고바야시 칸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는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등 뒤로 시선을 받으며 나는 취재를 계속한다. 아는 분이세요, 하고 이연희 씨가 귀엣말로 물어 할 수 없이 일본의 담당편집자라고 설명을 했다. 취재를 끝내고 보니 칸나가 자리에 없다. 테이블에는 빈 커피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나는 이연희 씨에게 영어로, “어제 통역하신 분이 실수가 많아 바뀐 건가요?” 하고 물었다. 이연희 씨를 대신하여 새로 통역을 맡은 여성이 아니오, 하고 일본어로 대답한다. “어제 그분은 처음부터 대타였어요. 무슨 볼일이라도….” “그 여자 분, 예전에 제가 알던 사람과 너무 닮아서요.” 의심을 받지 않도록 얼른 둘러댄다. “소설가란 사람들은 추억을 더듬는 것이 일이어서,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분을 만나게 되면 금방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펴게 되지요.” 영감이란 거군요, 하고 통역자가 눈을 반짝이며 물어본다. 나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영감이 없다면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어 낼 수 없을 겁니다.” 하고 덧붙였다. “저…. 어제 통역해 주신 분은 서울에 사세요?” 용기를 내어 물어보니, 아무런 의심의 눈빛도 없이 이연희 씨가 서툰 일본어로 대답한다. “분당이란 교외에 사세요. 호수 근처에 집이 있다고 들었는데 가 본 적은 없어요.” 설마 영감을 구하러 분당까지 가실 생각은 아니겠죠? 하고 통역이 놀리듯 물었다. 통역자와 이연희 씨가 한국어로 소곤소곤 뭔가 이야기를 나눈다. 두 사람 입가에 약간의 미소가 돌자, 내 상상은 더욱 날개를 단다. “선생님, 미리 말씀드려 두는데 최홍 실장님은 애인이 계세요. 이야기 해 봐야 아마 소용없을걸요.” 통역자가 빠른 어조로 못을 박는다. 이연희 씨가 웃는다. 함께 웃는 내 얼굴은 아마도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애인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빠진다. 체크인을 끝낸 고바야시 칸나를 호텔 바로 데려가 어째서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지 추궁했다. “휴가를 냈어. 구도 선생님 강연회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고, 서울과 후쿠오카는 엎어지면 코 닿을 데잖아? 잠깐 들렀다 간다고 아무도 뭐랄 사람 없다고.” 앞머리에 가려진 칸나의 눈을 들여다본다. 생기를 잃고 있던 칸나의 눈이 나를 흘겨보듯 일자를 그리자 눈가에 깊고 부드러운 한 줄의 주름이 만들어졌다. 흑요석 같은 요염한 눈동자는 곧바로 나를 향해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다. “당신을 데리러 온 거야.” 한 편의 시를 읊는 듯한 칸나의 낮고 힘 있는 목소리에 마음속에 있던 모든 말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고 감정의 호흡마저 멎고 만다. “당신이 날 한 번 더 사랑하게 되길 7년이나 기다리고 있어.” “그 이야기라면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고, 또 몇 번인가는 다시 되돌리는 시도도 했잖니.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렇게 되질 못했어.” “나도 알아. 당신한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 나는 시선을 비끼며, 그것도 이유이긴 하지, 하고 말끝을 흐렸다. “넌 작가인 날 좋아할 뿐이야.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니라, 네가 자랑할 수 있는 날 좋아할 뿐이라고. 넌 날 만들어 가고 싶은 거야. 날 발굴해 내고 그리고 내 미래를 네 생각대로 그려 가고 싶은 거라고.” 칸나가 웃었지만 그 눈은 웃지 않았다.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깬 것은 안쪽에서 나타난 외국인 뮤지션들이었다.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던지며 헬로, 하고 떠들썩하게 인사를 한다. 바 한쪽에 있는 작은 무대에서 사운드 체크가 시작된다. 꼼꼼한 리허설이 아닌 곡의 전주 혹은 간주의 일부를 확인하는 정도의 간단하고 쉬운 것이다. 연주하는 곡들은 왕년의 재즈와 누구나 알 수 있는 팝이었지만, 탄력적인 연주를 몇 분 들려주고는 다시 악기를 놓고 우르르 잡담을 하며 분장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행가 같은 건 딱 질색이야.” 고바야시 칸나가 작은 소리로 말한다. “추억에 매달려 사는 사람을 보면 슬퍼져.” “그건 내 얘기구나.” 칸나는 시선을 피해 뮤지션들이 사라진 무대에 해변의 표류물처럼 남겨진 악기들을 바라본다. “나한테는 마지막 기회니까.” 마치 예전의 블루스 곡을 흥얼거리듯 그리운 목소리로 칸나가 고백했다. 손목에 찬 카르체 시계가 은빛으로 빛난다. 초침이 없는 시계인데도 왠지 초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나는 시계를 들여다보며 일본과 한국 사이에 시차가 없다니 거짓말 같지, 하며 화제를 바꾸었다. “시차?” 칸나는 쓴웃음 지은 후, 말한다. “추억이 아닌, 지금을 살고 있는 날 봐 줘.” 번역 김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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