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7.20 17:20 수정 : 2005.07.20 17:28

새로 개금하기 전 기존 금칠을 벗긴 상태로 찍은 해인사 법보전 비로자나불상.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풍성한 살집이 느껴지는 미남형 불상이다.

법보전-대적광전 두 불상 1000여년전 왕실연인들의 애정 깃든 커플 불상일까

저 유명한 팔만대장경의 보금자리인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에서 지난 4일 국민적 관심을 모은 발표가 있었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 건물의 일부인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경남 유형문화재 41호)이 국내에서 가장 오랜 9세기 통일신라 목조 불상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불상에 새로 금칠을 하는 개금 도중에 불상 안 빈 내벽에서 당나라 희종의 연호인 중화 3년(883년)에 완성했다는 먹글씨가 씌어진 나무판이 발견된 것이다. 명문상의 조성 시기는 국내 최고의 목조 불로 꼽혔던 13세기 말 서울 개운사와 충남 서산 개심사 아미타 불보다 4세기나 앞섰다. 학계에서 눈여겨보지 않았고, 사찰쪽에서도 조선시대 불상으로만 추정했던 터라 이 ‘낭보’는 화제를 흩뿌렸다. 서양 미술사에 견준다면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 조각물이 중세 것으로 판명난 셈이다. 왜 이런 편차가 난 것이며 불상은 또 어떤 내력을 지녔을까.

실제로 불상 명문과 천년 고찰에 얽힌 옛 기록들의 미스터리는 호사가들의 소설적 상상력을 자극할 만하다. 명문은 불상 안 벽에 못으로 박은 나무판에 두 줄로 쓰여져 있었다. 일부 해석이 엇갈리긴 하지만, 대략 내용은 두 가지다. 중화 3년인 계묘년 여름에 금칠해 완성했으며, 신라 최고 관직인 대각간 벼슬아치와 그의 비(아내)가 발원해 각각 등신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4일 발표 현장에서 원로 미술사가 진홍섭씨가 이런 해석을 제시하자, 현장 관계자들 사이에서 당장 ‘대각간은 위홍’이란 수군거림이 들렸다. 위홍은 통일신라 말 음탕한 생활로 실정을 거듭했다는 진성여왕의 애인이자 권세가다. 왜 위홍이 법보전 불상과 연관이 있다는 것일까?

이와 관련해 한국불교연구원이 75년 낸 책자 <해인사>에는 흥미로운 사적이 나온다. 조선 성종 21년(1490년) 해인사 중창 당시 현 대적광전인 비로전 처마의 부재 사이에서 발견된 전권(땅을 하사받거나 사들인 경위를 기록한 문서)을 설명한 문인 조위의 <서해인사전권후>란 기록이다. 문집 <매계집>에 실린 이 기록은 이렇게 적고있다. ‘헌강왕 11년(885년) 을사년까지 해인사는 ‘북궁해인수(北宮海印藪)’라고 불리우다가 진성왕 4년인 경술년(890년)부터 혜성대왕 원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불상 안벽에 붙은 나무판에 쓰여진 먹글씨 명문. 해인사 제공
글에 나오는 혜성대왕은 진성여왕 2년(888년) 위홍이 죽자 여왕이 그를 추모해 높여 붙인 시호다. 죽은 위홍을 기리는 추모당이 곧 해인사였다는 말이다.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이 재위 11년째인 898년 퇴위한 뒤 북궁에서 숨져 황산에 장사지냈다는 대목도 나온다. 조위의 기록을 감안하면 북궁인 해인사에서 여왕이 만년을 살다 세상을 떴다는 얘기가 된다. 장사 지낸 황산에 대해 <삼국유사>는 경주 모량 서쪽의 산이라고 했는데, 이 지명은 해인사 들머리인 합천군 가야면 황산리 뒷산의 이름이기도 하다. <서해인사전권후>는 ‘해인사를 위홍의 원당 삼았고, 왕위도 버리고 해인사로 가서 지내다 죽었으니, 죽어서도 함께 묻히고자 원했기 때문’이란 해석까지 붙여 놓았다. 게다가 <삼국유사>는 위홍을 진성왕의 배필(남편)이며 직위를 대각간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법보전 불상의 대각간과 비 명문을 놓고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찧을 법한 상황이 설정된 셈이다.

또 법보전 불상은 대적광전에 있는 비로자나불 불상과 크기와 모양이 닮아 두 구의 등신대 불상을 조성했다는 명문 내용과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금칠을 벗긴 법보전 불상 사진을 보면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수려한, 미남형 용모다. 대적광전의 불상 또한 주름, 옷 윤곽, 얼굴 등이 그런 식이어서 학계에서도 두 불상의 닮은 꼴은 오랜 화제거리였다. 발표 이후엔 대적광전 불상도 법보전 불상과 같은 시기 것이란 추론이 일부에서 고개를 들었다. 정말 두 불상은 위홍과 진성여왕의 사랑이 깃든 커플 불상일까. 미술사학계의 시각은 대체로 싸늘하다. 교리상 비로자나불 상을 동시에 봉안하는 것은 국내는 물론 중국, 일본에도 전례가 없는 발상인데다, 대적광전 불상을 자세히 보면 얼굴 표현이 평면적이어서 시대적 차이가 드러난다는 견해다. 상당수 연구자들은 대적광전 불상이 고려 또는 조선시대 법보전 불상을 본떠 만든 복제상이 명백하다는 주장을 편다. 법보전 불상이 통일신라 것이라는 데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불상을 검토한 강우방 이대 교수는 자연미 돋보이는 표정이나 주름 양식상 통일신라 양식이 분명하다고 했지만, 문명대 동대 교수 등은 나무판 명문의 형식이 어색하다는 점 외에도 동시대 복장유물이 없다는 게 이상하며, 양식상 조선시대 것으로 보인다는 이견을 제시했다. 종단 안에서도 학계 의견을 모으지 않고 서둘러 단정적 발표를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대적광전의 불상 안 복장에 명문이 있는지 검토하고, 개봉되지 않은 법보전의 복장물과 나무 재질을 심층조사하자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런 맥락이다.두 불상이 1000여 년전 왕실 연인들의 애정 불심이 깃든 커플 불상이었는지를 밝히는 데는 더욱 난감한 검증절차가 필요한 셈이다. 어쩌면 그 비밀은 영원히 부처님만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합천/노형석 기자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