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0 20:12
수정 : 2005.07.20 20:18
서은영의트렌드와놀기
오랜만에 영국에서 만난 가족과 함께 스페인 말라가로 여행을 떠났다. 파블로 피카소가 태어난 말라가에는 피카소 미술관이 있다. 테이트 모던은 물론 뉴욕의 모마 미술관 등 여러 곳에서 피카소의 작품을 만날 수 있지만 스페인에서 그의 작품을 본 느낌은 다른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가 즐겨 쓰는 색상, 그의 그림 속에서 볼 수 있는 여성들이나 식물의 모양이 어떠한 정서 속에서 나왔는지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넓고 넓은 사막에 우뚝 서 있는 선인장과 뜨거운 햇살 속에 핀 기이하게 생긴 꽃들은 초현실적인 묘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곳의 환경과 문화를 이해하며 피카소의 작품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미술관에서는 초등학교 5, 6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그림이나 조각물 앞에 앉아, 심지어 배를 깔고 누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외국 박물관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는 일인데도 또다시 부러움과 질투에 휩싸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 아이들은 색상과 조화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세포로 느끼며 상상력과 감성을 키우고 있다.
패션에 있어 상상력과 감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떻게 하면 감각을 기를 수 있는지, 유학이나 대학원에 가면 되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는데 난 언제나 머리로 하는 공부는 한계가 있고 상상력을 키우는 훈련을 하라고 답한다. 상상력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상상력과 감성은 패션 디자이너나 예술가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많은 이들의 상상력과 노력 덕분에 인간이 하늘을 날고, 우주까지 갈 수 있게 되지 않았나. 또 제품력과 기술력만 가지고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제품과 정보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영국에서 인테리어 제품 전문 매장에 들렸을 때, 눈길을 끄는 곳이 있었다. ‘브이아이피(VIP)’라는 컨셉으로 특별 판매되고 있는 몇 가지 제품 때문이었다. 매끈하고 유연하게 생긴 오브제나 하나의 건축물처럼 만들어진 라디오와 같은 기능성 제품들이 가구들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이 제품들이 바로 브이아이피 제품들이었다. ‘매우 중요한 사람(Very Important Person)’이 아닌 ‘매우 중요한 제품(Very Important Product)’이라는 독특한 컨셉의 이 물품들은 사실 전문 인테리어 디자이너들의 작품이 아닌 건축가나 아티스트들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매끄럽고 유연하게 생긴 아름다운 메탈 오브제는 하이힐을 생각나게 했는데, 그것은 바로 살아 있는 전설로 통하는 구두 디자이너인 마놀로 블라닉이 디자인한 것이었다. 마놀로 블라닉에 대해 잠시 설명하자. 피카소, 달리, 페드로 알모도바로와 함께 스페인이 자랑하는 천재로서, 세계적으로 열풍을 일으켰던 시트콤 <섹스 &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가 오매불망 꿈에 그리는 구두로 더욱 유명해진 디자이너다.
이제 패션과 예술은 새로운 산업 혁명을 일으키고 있다. 얼마 전 이탈리아의 패션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벤츠의 새 차 내부를 디자인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아르마니조차도 자신이 자동차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상상력은 새로운 세계를 제시할 수 있는 열쇳말이 될 것이다.
서은영/스타일리스트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