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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09 20:09 수정 : 2005.08.10 00:09

삶의 양식과 그 표현으로서의 문화는 지난 60년간 급속하게 변화했다. 그러나 한국인이 공유할 ‘좋은 사회’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큰 문화적 ‘실패’다. ①빈곤;미국 사진가 디미트리 보리아가 한국전쟁 때 촬영한 어느 판자촌. ②대중문화의 탄생;1960년대 서울 충무로 극장 입구에 관객들이 장사진을 이룬 모습. ③청년과 저항;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했던 김민기씨(왼쪽에서 세번째)가 청평가요제에서 노래부르는 모습. ④자본과 노동;삶과 예술의 대안을 고민했던 80년대 후반 노동자문화패의 노래공연. ⑤신세대;90년대 초에 등장해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꾼 서태지와 아이들 ⑥한류;지난해 칸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올드보이> 제작진. ⑦소수자;대중문화와 민중문화 모두로부터 소외당했던 성적 소수자들이 지난 6월 ‘퀴어문화제’를 벌이는 모습.

한국 지성 광복 60돌을 말하다 - ① 문화 <새패러다임을 향해>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광복 60주년을 맞아 당대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정치·경제·문화·여성의 60년사를 성찰하면서 한국 사회 각 분야의 과거를 돌아보고 다가올 반세기에 이뤄야할 과제를 짚어본다. 도정일 경희대 교수, 이병천 강원대 교수, 정현백 성균관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가 분야별로 기고를 하고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정리 좌담을 나눈다.편집자

<글싣는 순서>

1. 문화:새로운 문화체제를 향해 - 도정일 경희대 영문과 교수
2. 경제:공화국의 오래된 미래 -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3. 여성:끼어들기와 새판짜기 - 정현백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4. 정치:국가보안법 없는 광복절 -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5. 좌담:분단의 과거, 평화의 미래 -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황우석 교수가 복제 강아지 ‘스누피’를 세상에 소개하던 날,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한 업체가 개를 복제해보려고 7년간 1900만 달러를 쏟아 붓고도 아직 성공하지 못했는데 한국인들은 3년 만에 해냈다고 보도했다. 이 괴력의 비밀은 무엇인가? 황우석은 마술사?

2년 전 줄기세포 추출에 성공했을 때 황 교수가 한국인의 ‘젓가락 문화’를 비결로 내세웠던 일은 이제 은근히 유명한 일화가 되어 있다. 젓가락 문화론에 대한 생물학적 반응은 어떨지 몰라도 문화론자들은 “봐라, 문화는 중요하다”며 좋아할 법하다. 과학 연구에도 문화는 중요한가? 경제발전을 이루고 민주주의를 하는 데도 문화는 중요한가?

스누피 소식을 전한 <뉴욕타임스> 기사에는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있다. 황우석 팀이 3년 간 하루도 쉬지 않고 매년 365일, 매주 7일을 꼬박 일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이건 주말 특히 일요일은 반드시 쉬어야 하는 ‘안식일 문화’와는 너무도 다른 문화다. 하느님도 쉬었다는 그 일요일을 한국인은 쉬지 않는다? 황 교수 팀만 그런가. 한국인은 이미 온 우주에 이름난 일벌레다. 게다가 한국 일벌레들은 ‘굼벵이 문화’는 도저히 참지 못하는 초고속 일벌레다.


1945년 식민족쇄에서 풀려난 한국이 전쟁의 상처까지 딛고 일어나 이른바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룬 힘의 비결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견해들이 많다. 그 중에 설명의 열쇠를 ‘문화’에서 찾은 사람이 하버드 대학의 새뮤얼 헌팅턴이다. 그에게 문화란 삶의 양식이나 표현영역으로서의 문화보다는 ‘한 사회 내에서 우세하게 발현하는 가치, 태도, 신념, 지향점, 그리고 전제조건’이다. 어떤 가치가 우세한가에 따라 문화는 사회발전 특히 경제발전을 돕고 이끄는 ‘발전지향적’ 문화와 발전을 가로막는 ‘발전저항적’ 문화로 나뉜다. 가령 한국인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검약, 투자, 근면, 교육, 조직, 기강, 극기정신 등은 정확히 발전지향적 문화가치라는 것이 헌팅턴의 생각이다.

지난 60년간 한국인의 삶을 바꿔놓은 주요 변화들은 민주주의와 빈곤 탈출이라는 두 개의 축에 연결되어 있다. 문화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와 빈곤극복은 한국인 누구에게도 공짜로 온 선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60년 동안 수없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엄청난 희생과 비용을 치르고서야 이뤄낸 성취이고 발전이다. 그런데 왜 그토록 큰 비용이 필요했는가?

낯선 건달처럼 들이닥친 민주주의
엄청난 비용 청구하며 채운
소프트웨어란 독재·권위주의·돈
내용물 바꾸기 위한 희생 치렀지만
시장주의가 본질 가치 ‘납치’
아직 ‘좋은 사회’ 밑그림 못그려

우리는 민주주의를 할 만한 문화를 미리 가지고 있다가 민주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문화의 토양 위에 핀 꽃이 아니라 자갈밭에 생짜로 뿌려진 씨다. 낯선 건달처럼 어느 날 한국인의 삶에 통성명도 없이 들이닥친 것이 정치 민주주의다. 한국인이 투표를 해본 것은 머리털 나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때가 처음이다. “머시라, 왕을 뽑는다고?” 초대 대통령 선거 때 한국인 대다수가 보인 첫 반응은 그런 것이다. 사회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으로서의 문화라는 헌팅턴 식의 생각과는 다르게 정확히 ‘문화의 결손’ 위에 시도된 것이 한국 민주주의다. 그리고 이 문화적 결손이 그 후 50년간 우리 사회에 청구한 비용과 희생은 엄청나다.

50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하드웨어에 담겨 있었던 소프트웨어는 어이없게도 독재, 권위주의, 그리고 돈이다. 이 소프트웨어를 비우고 바꾸기 위한 긴 투쟁과 희생의 서사가 현대 한국인의 사회사이며 그가 써야 했던 상처의 문화사다. 그 문화사의 알맹이는 구사회적 문화체제를 새로운 문화체제로 바꿔내어야 했다는 것이고, 비용과 희생이 요구된 까닭은 문화의 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비싼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은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이면서 동시에 문화체제라는 것, 제도와 법률만으로는 민주주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 민주주의의 진정한 소프트웨어는 민주주의 문화이며 그 문화 없이 민주주의는 껍데기라는 것이다.

문화의 교체는 아직 끝난 작업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행위자들을 길러내고 사람들의 태도, 정신상태, 행동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 전 영역적 가치체계가 문화다. 마치 유전자처럼 문화는 인간과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강력한 복제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호박이 호박을 낳듯 부패문화는 부패한 인간을 낳고 ‘연줄’의 문화는 ‘연줄’에 목매다는 인간, 관계, 행태를 복제해낸다. 사회 관계가 바뀌어도 문화의 중력은 오래 간다. 예컨대 수직 서열문화, 학벌주의, 유명한 ‘끼리끼리즘’(연줄문화), 노동 천시, 여성 비하 같은 왕조시대의 신분사회적 문화잔재들은 시대가 바뀐 지금에도 상당수 한국인의 내면을 지배한다.

문화는 경제발전에 봉사하는 도구적 가치들을 제공하기 때문에 중요한가? 헌팅턴이 열거한 ‘한국인의 가치’ 목록에는 그가 경제성장에 유용하다고 판단한 가치들이 올라 있다. 그러나 문화가 중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딴 데 있다. 문화는 삶을 인도하는 의미, 가치, 목적의 궁극적 공급자다. 한 사회가 어떤 문화를 만들고 어떤 문화적 가치를 강조하는가가 그 사회의 성격과 정체성, 품질과 수준을 크게 좌우한다.

이 관점에서, 광복 60년이 되도록 한국인이 공유할 ‘좋은 사회’의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은 우리의 큰 문화적 실패다. 정파, 이념, 개인적 목표,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 사람들이 공유할 좋은 사회의 비전 없이는 공동체의 유지, 신뢰, 협동, 선의가 불가능하고 공정한 경쟁도 가능하지 않다. 좋은 사회의 그림은 양질의 문화적 가치들 위에서만 그려질 수 있다. 문화가 반드시 좋은 가치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가 동의하고 공유할 근본적 가치들은 있다. 생명, 자유, 평화, 안전, 인권은 그런 가치이며 창조성, 다양성, 공정성, 관용, 배려, 환경, 공존도 그런 가치이다. 이런 본질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추구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민주주의이고 경제적 수단이 번영이며 사회적 수단이 정의다.

그런데 지금, 어떤 광적인 가치전도 현상 하나가 우리를 물구나무 세우고 있다. 이른바 ‘경제적 가치’라는 것이 사회의 근본 가치들을 납치하는 현상이 그것이다. 경제발전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경제적 가치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그런데 그 도구적 가치를 되레 목적 가치로 삼아 다른 더 중요한 가치들을 시궁창에 내던지는 것이 경제제일주의 논리이고 시장근본주의 논리다. 정치, 언론, 교육 등 공적 영역들조차도 시장근본주의의 시녀가 되기 위해 새벽부터 줄 서기 바쁘다. 시장은 지금 민주주의와 시민적 권리에 대한 거대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이는 정치독재나 진배없는 위험한 사태다. 과거 군사정권들이 민주주의를 납치한 상태에서 추구했던 ‘야합 성장주의’(권력은 돈을 벌게 해주고 돈은 권력을 지탱해주기)가 ‘경제논리’로 얼굴을 바꾸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자유를 위한 투쟁이 이제는 시장을 상대로 전개되어야 할지 모를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도정일 경희대 영어학부 교수
경제 발전은 중요하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행정학자 마리아노 그론도나의 말처럼 경제 발전은 오히려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에만 맡겨둘 수 없다. 이것이 경제 발전의 역설이다. 경제적 가치만으로는 경제 발전을 이룰 수 없다. 왜? 경제적 가치는 탕진될 수 있지만 비경제적 가치는 탕진할 수 없는 가치이며, 경제 발전과 번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게 하는 것은 그 탕진 불가의 본질적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한 국가가 부유해질 때, “부의 추구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이 그 나라의 가치체계 속에 존재해야 한다.” 그론도나의 이런 지적들은 이 성찰의 시간에 우리가 경청해야 할 소중한 충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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