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성 광복 60돌을 말하다 - ② 경제 <공화국의 오래된 미래>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남쪽 자본주의가 승리했는가?계급 불평등·노동위기 오늘처럼 심각한 시대 없었다
다수가 원하는 정상국가는 경제대국 생활빈국이 아니라
적정성장국가 생활부국이다 광복의 봄날은 짧았다. 남북으로, 이데올로기로, 계급으로, 동서로 갈려 서로 피흘리며 죽기 살기로 싸우고 그 대결 속에서 살아 남고 일방의 승리를 위해 삶의 에너지를 온통 탕진하고 동원돼야 했던 한 시대를 살았다. 이제 6·15 공동 선언이 이뤄지고 남북 경제 협력이 진전되면서 적어도 남북간 극단적 대결과 동원의 시대는 화해와 공존의 시대로 진입했다. 개성 공단은 남북이 협력·공생하는 ‘한반도 민족 경제’로 가는 상징이 되고 있다. 이로써 우리 현대사는 한 순환을 끝내고 새로운 순환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의 물음을 우회할 수 없을 것이다. 남한이 세계 속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북한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기아의 동토로 전락하지 않았더라면 6·15 공동선언이 과연 이뤄질 수 있었을까. 남한 자본주의의 성공과 북한 사회주의의 실패가 양쪽의 운명을 가르고, 대결에서 공존으로 가는 근본 조건이 됐다면 이는 광복 60년사에서 실로 대역설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그간 남한이 일궈 온 성장의 성취를 애써 외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남과 북의 성공과 실패가 주는 역사적 교훈을 철저히 학습해야 할 것이다. 성장제일·반공국가주의 그늘 성찰해야
그러나 광복 60년, 회갑을 맞이한 오늘 우리의 역사적 성찰력이 “남쪽이 북쪽보다 더 잘했다”는 식의 승리주의만 가지고 되겠는가. 우리 안의 그늘을 돌아보고 상처를 잘 치유해야 한다. 근대화 시대 ‘하면 된다’는 열정으로 한국형 기업의 화신이 됐고 소떼몰이로 남북화해 시대를 연 주역이 된 현대 재벌이, 동시에 무책임하고 불투명하며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황제 경영‘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세계화 시대 ‘IT 한국‘을 대표하면서 초일류 기업을 지향하는 삼성 재벌이, 동시에 노조를 탄압·배제하고 초보적 공정시장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 천민 기업이자, 국제 금융자본과 결탁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범이기도 하다는 사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이 ‘삼성 공화국‘으로 전락했다고 국민들로부터 지탄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 경제의 빛과 그림자가 집약돼 있다. 한국 현대경제는 전통적 지주 계급의 몰락, 강한 재벌과 약한 노동, 약한 중소기업, 그리고 세계 시장에의 높은 통합 양식이 특징적이다. 이 기본틀은 산업화 도약기 이전인 1950년대 ‘원조 경제’ 때부터 이미 나타난다. 6·25 전쟁이 끝나면 토지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중요산업 국공유와 노동자 이윤 균점권까지 규정해 놓았던 제헌 헌법은 시장논리와 사유재산권을 한층 강화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특혜적 귀속 재산 불하와 원조 물자 배정에 힘입어 재벌이 형성되고 일부 수입 대체 공업화가 진전됐다. 이때부터 벌써 한국은 국영부문과 중소기업이 병행발전하는 대만모델과 다른 길로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 경제는 원조의 젖줄을 떼고 자기 발로 설 수 있는 내부 동력을 갖추지 못했다. 한국의 산업화 이륙은 박정희 ‘개발 독재’ 체제를 통해 일어났다. 한 손으로는 금융을 통제하면서 거대한 특혜를 제공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시민사회의 발전을 억압하고 노동을 배제적으로 동원함으로써 ‘기업하기 좋은 나라’, 아니 ‘재벌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자본 투자를 산업적 축적과 국민경제 형성의 방향으로 유도한 개발독재국가가 출현했다. 강한 주권독재와 강한 재벌 권력의 공조 체제,‘머리가 두 개 달린 리바이어던’이라고 할 이 개발 지배 블록이 미국의 패권 반경 안에서 세계 시장에 전략적 개방 또는 선별적 통합 방식을 추구함으로써 ‘한강의 기적’이 일어 났다. 한국의 산업화 모델은 확실히 수출 지향적 모델이기는 했다. 당시의 수출 환경도 예외적으로 좋았다. 그렇지만 투자의 무게 중심이 수출에 놓여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모델의 핵심은 수출 주도라기보다 오히려 투자 주도의 복선형 성장체제에 있었다. ‘한강의 기적’ 뒤에 노동탄압 야만의 흔적 그러나 자본이 독차지하는, 무상이나 다름없는 어마어마한 특혜와 대조적으로 국민 대중이 산업적 근대화의 비용을 가장 무겁고 힘겹게 짊어졌던 ‘시초 축적의 비밀’을 들추어 보아야 한다. ‘공돌이·공순이’ 또는 ‘산업 전사‘라 불리며, ‘노동 감옥’에 갇혔다 할 정도로 피와 땀을 흘렸던 노동자들의 헌신과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라며’ 온 몸을 불사르며 절규 했던 이들의 항의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개발이 독재의 수단이 되기도 했거니와, 정경 유착과 부정부패, 계급·산업·기업·지역 등에서 드러난 극도의 집중과 불균형, 무책임과 불투명성, 그리고 환경 파괴는 한국 모델에서 특히 유별나다.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는 굴욕적 한일 수교와 베트남 침략전쟁 가담의 대가가 ‘한강의 기적’을 꽃피웠다. 이처럼 반공국가주의-성장제일주의에는 야만의 ‘흔적’이 새겨져 있다. 아래로부터 억센 저항과 투쟁이 개발 독재 리바이어던의 성채를 가로 질렀다. 그 재량적 성장 정당성은 민주적 정당성의 도전앞에 균열되고 위기에 빠졌으며 마침내 무너졌다. 이른바 ‘정상국가’의 길을 주도한 자유주의 정부는 ‘잘살아 보세’ 대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을 내걸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경쟁 시장과 ‘1원·1표 소유권이 곧 정의’라고 하는 ‘개혁적 신자유주의’ 노선을 넘어서지 않는다. 사적 소유권, 아니 ‘자본의 자연권’의 신성화라는 면에서는 53년, 61년 체제를 이어받고 있다 할 것이며, 우리는 자본의 전제적 주권에 의한 사회경제적 시민권의 형해화를 겪고 있다. 87년 체제의 최대 과실은 한국형 대부르조아인 재벌이 차지했으며, 97년 위기와 구조조정 이후 경제권력의 ‘공(ball)’은 다시 국제 금융 자본과 재벌 연합의 수중으로 옮아 갔다. 이는 지난날 국민 대중이 산업적 근대화의 비용을 가장 무겁게 떠안았던 사실과 더불어, 현대 한국 경제에서 최대의 구조적 모순으로 손꼽아야 할 사건이다.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는 국경의 관리가 무장해제된 상태에서 국제 금융 자본과 자본 연대를 이룬, 세계적 경쟁력을 가진 소수 재벌이 돌출적으로 시장 권력 피라미드의 정점에 위치해 있고, 투자와 금융의 국내적 연관이 끊어지고, 개발 연대 이래의 조립 가공형 재생산구조가 확대 재생산되고, 노동 빈민이 양산되면서도 복지와 참여는 낙후돼 있으며, 지역 불균형 또한 여전히 심각하다. 한국 현대 경제사상 계급적 불평등과 ‘노동의 위기’가 오늘처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적은 없었다. 이런 다면적인 양극화의 함정안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곧 국민이 살기 좋은 나라가 될 리가 있겠는가. 삼성공화국 아닌 시민경제공화국 세우자 우리 국민들은 사회경제적·시민적 기본권이 보장되는 삶을 원한다. 성장, 분배와 복지, 참여가 병행 발전하는 건강한 경제를 바란다. 성장 일변도의 속도를 늦추고 양질의 노동과 충분한 자유시간을 갖고 싶어한다. 자연과 공생하며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이 균형잡힌 풍요로운 삶을 희망한다. 국민들이 원하는 정상 국가는 경제 대국, 생활 빈국이 아니라 생활 부국, 적정성장 국가다. 60년전 광복의 봄날 강한 부자 나라가 아니라 ‘높은 문화의 힘’을 지닌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던 김구 선생의 소원이 오늘 우리의 희망과 다르지 않다. 우리를 좀 우울케 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이 오래된 미래로 가기에는 자본 세계화의 엄호를 받는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그 물적·이데올로기적 힘이 너무 세다는 것이다. ‘정상국가’로 간다고 하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는 절름발이 국가다. 구체제의 역사적 구속성이 아주 크고, 너무 일찍 세계화 소용돌이속에 휘말려 들었다. 어떻게 해야 삼성의 공화국이 아니라 공화국 속의 삼성을, ‘삼성이 길들이는 공화국’이 아니라 ‘삼성을 길들이는 공화국’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대한민국의 구체제, 48년·53년·61년·87년 체제를 딛고 넘어, 돈의 검열을 이기고 성숙한 문화의 향기를 꽃피우는, 사회생태적 시민공화국과 시민경제를 세울 수 있을까. 단지 광복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새 건국을 위한, 우리들의 주체성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지혜가 문제다. / 이병천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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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0년은 ‘공화국’ 대한민국 헌법이 규정한 경제정의의 꿈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진 시간이기도 했다. ①원조경제;1956년 미국이 제공한 잉여농산물을 창고에 옮기는 모습 ②독재와 재벌;1964년 충북단양 현대시멘트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 회장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③④⑤노동자;1970년 전라도 광산 제사공장의 여성노동자, 같은해 3월 아들 전태일의 영정을 안고 오열하는 이소선씨, 1980년 서울 노총회관에서 복직요구농성을 벌이고 있는 동일방직 해고자들 ⑥금융위기;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 지원 합의문을 발표하는 임창열 부총리와 캉드시 IMF 총재 ⑦남북공생의 가능성;개성공단의 전경. 이상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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