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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남북 분단 극복 도움 못준다면 방해하진 않아야”, 황석영 “민중이 허리띠 졸라매 이룬 역량이 한국 정통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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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북-일 관계 개선 한국 지식인이 다리놓을 차례
오에 겐자부로, 일본이 유해한 나라 안되도록 하는게 나의 임무
[광복60돌 대담]
8월15일은 우리에겐 광복의 날이지만, 일본에는 패전의 날이다.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오늘에도, 두 나라는 제국주의 시절에 맺어진 악연의 고리를 거의 풀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실공히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지식인인 황석영씨와 오에 겐자부로의 대담은 지난달 14일 황씨가 도쿄 세타가야구 오에의 자택을 방문해 이뤄졌다. 2시간 남짓 진행된 이날 대담에서 두 사람은 최근 작품활동에서부터 두 사람의 문학세계, 문학의 현재와 미래 등에 대해 폭넓게 얘기를 나눴다. 또 우경화로 치닫는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악화된 한-일 관계의 개선과 한반도 분단 극복,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한 해법을 함께 모색했다.
문학과 사회에 대한 인식이 비슷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으로 꼽히는 두 사람은 대부분의 논의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또 8살 터울인 두 사람은 대담 내내 형제 사이처럼 서로에 대한 살가운 정을 나타냈다. 특히 오에는 황씨가 노벨 문학상에 걸맞은 작가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그의 수상을 지원하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다.
황석영=요즘 작품활동에 대한 얘기를 먼저 나눠 보겠습니다. 오에 선생은 지난 5월 서울서 열린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했을 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신작을 집필중이라고 했는데요?
오에=<안녕 나의 책이여>라는 장편소설을 얼마전 완성했습니다. 가을에 출판할 예정입니다. 나와 비슷한 노년인 소설가와 건축가의 소년시절부터 현재까지를 그린 작품이지요. 전후 60년 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해 인생의 마무리를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후기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일본의 태평양전쟁 패배를 10살 때 겪은 나 자신이 소설가의 모델입니다.
“나지막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
황=현대 중국에서도 루쉰 이후에 그에 버금가는 대가는 별로 없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에서 몇분 남지 않은 원로 중의 하나이신데, 건강을 유지하면서 좋은 작품을 내놓기를 먼저 기대합니다. 나는 지금 런던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과 지내온 시대에 대해 약간의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에서 베트남전쟁, 군사독재, 광주항쟁까지를 다룬 자전을 쓰고 있지요. 벌써 자전을 쓰느냐고 하는 분도 있지만, 이는 나의 후반기 문학을 새롭게 정리하고 준비하기 위한 작업입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파리로 옮겨 영국 출판사의 ‘신화 프로젝트’에 응하여 우리의 무속설화인 <바리데기>를 쓸 작정입니다.
선생은 지난 5월말 대산문화재단이 서울에서 주최한 ‘국제문학포럼’에 참가했고, 대학에서 강연도 하시고 독자와의 만남도 가졌습니다. 방문 소감은 어땠는지요?
오에=당시에 이번 소설에 대해서도 얘기했지요. 일본과 일본인의 현재와 미래가 정말 어려움에 봉착했다고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을 소설에 담고자 했습니다. 일본인의 현재의 어려움이라는 것은 악화된 한국, 북한, 중국과의 관계 등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어려움이죠. 이와 관련해 뭔가 현실적인 노력을 하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T.S. 엘리엇의 <네 사중주>로부터 “우리는 나지막이 나지막이 움직이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시구를 인용해 그런 생각을 표현했습니다.
한-일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아 상당히 긴장해서 얘기를 했는데, 나를 비롯해 다른 참석자들의 얘기를 청중들이 참 잘 들어줬습니다. 나는 10년 만에 한국을 찾았어요. 작가나 학생, 독자 등 청중들이 대단히 성숙되고 여유를 갖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황=그것은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민주화의 좋은 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민주화의 가장 큰 미덕인 표현의 자유가 확보되고 언로가 열리면서 누구나 하고 싶은 얘기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 외국 작가들에 대해서도 옛날보다 훨씬 열린 자세로 대할 뿐 아니라, 참가한 대부분 작가의 작품들을 서점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폭넓게 번역돼 외국 작가들을 친근하게 대할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한국의 현대 문학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 현재 세계 속에서 문학이 놓인 상황과 미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에=지금까지 한국 문학과 관련해 긴 글을 써온 것은 김지하씨의 시에 대해서였어요. 지금도 그에게 경의를 갖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에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작가는 황석영씨입니다. <객지>가 일본에서 소개된 이후로 황 선생의 작품을 계속 읽어오고 있어요. <손님>을 읽고선 정말 감동했습니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다면적으로 확실하게 포착한 데다 한국의 민중문화가 문학의 형식과 방법으로서 튼실하게 녹아 있더군요. 그리고 참으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적대세력 사이의 화해가 가슴을 울릴 만큼 강력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나는 소설에는 ‘소설의 목소리’라는 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작가에겐 지성이나 학식, 경험 등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이런 것을 포함해 소설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작가, 그 목소리가 강하게 울리는 작품이 좋습니다. 그것이 소설의 근본적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손님>의 영어판의 추천서에서도 썼지만,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소설의 목소리를 갖고 있는 작가가 황 선생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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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과 ‘냉전 박물관’ 판문점 함께 갔을때 한-일연대 ‘애물’ 치우잔 생각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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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나는 오에 선생의 소설을 대학생 때 처음 봤습니다. 특히 <사육> 같은 단편이나, 장편 <짓밟히는 싹들>에 나오는 전쟁 중의 아이들 이야기는 저희들의 체험이기도 해서 깊은 공감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일본 작품은 자유당 정권 때는 전혀 소개되지 않다가 4.19 이후 한-일 관계가 개선되면서 한꺼번에 고전부터 현대까지 여러 작품들이 번역돼 소개됐지요. 오에 선생의 초기 단편과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들이 먼저 소개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전후에 일본의 근현대 문학을 처음 접하게 된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김지하 시인 구명운동에 앞장서는 것을 보고 오에 선생의 국제적인 연대운동이나 사회적 실천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됐습니다. 우리들은 나쓰메 소세키라든가, 시가 나오이, 다니자키 준이치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등의 세대들보다는 오에 선생을 비롯해 가이코 겐, 아베 고보, 엔도 슈사쿠 등 바로 윗세대 일본 작가들에게 상당한 친근감을 느낍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상황 속에서 서구화된 자유와 현대성 같은 것을 배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에=지금 일본 문학계에서 가장 큰 문제는 출판저널리즘이 대량으로 팔리는 책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뛰어난 작가이고, 그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는 ‘하루키 이후’라는 현상이 존재합니다. 일본의 출판사는 물론 광고, 서점의 판매 방식 등이 모두 널리 많이 팔리는 책이라는 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젊은 작가들이 이런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젊은 작가들이 이런 흐름에 저항해 정말 읽을 가치가 있는 소설을 쓰는 결의를 할 것인가에 일본 문학의 앞으로의 가능성이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황 선생이 오랫동안 지향해온 바를 물려받는다면 한국 문학에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또 내가 저항적인 작품을 많이 쓴 것은 아니지만 후기의 작업과 같은 일에 일본 작가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면 미래가 있을 것입니다.
황=우리에게도 60~70년대까지가 일본의 좋은 현대 문학을 접하는 시기였습니다. 한국의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오히려 본격문학은 멀어지고 80년대 무렵부터는 일본의 역사·전기·멜로 등 대중소설류가 물밀듯이 밀려들어왔지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성이 어떻든 젊은 사람들이 통털어서 몇백만부씩 그의 책을 사 보는 형편입니다. 그전에는 고전부터 현대까지 두루 접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대중적인 것 외에는 소개되지 않습니다. 대단히 아쉽게 생각하고 있어요.
또 하나 아쉬운 점은 한국 군사정권 때 정부의 후원을 받은 일부 사람들이 한-일 작가 포럼을 여는 등 교류가 시작됐는데 한쪽으로 치우쳤다는 느낌이지요. 당시의 독재 치하에서 정치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들, 문단에선 이를 미화해서 순수문학 진영이라고 했는데요, 감히 얘기한다면 80년대에 문화공작적 측면에서 몇몇 사람들 중심으로 교류가 처음 진행됐어요. 여기에는 한-일 사이의 문제나 아시아의 문제를 살피면서 어떻게 하면 더나은 사회·정치적 상황을 만들어 나갈 것인가 하는 고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인보다 사회·시민단체 인사들 사이의 교류 연대 쪽으로 방향 전환을 했고 당시 정권의 간섭과 방해에 저항하면서 개별적으로 우의를 나눌 수가 있었던 셈입니다. 내가 일한연대위원회 소속 지식인들이나 시민단체 사람들, 노마 히로시 선생, 오에 선생을 만난 것도 85년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이번에 오에 선생의 한국 방문 때 함께 판문점에 갔었지요. 나는 그 전에 1989년에 방북했을 때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이번엔 거꾸로 남에서 북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어요. 대충 두가지 생각이 들더군요. 시간이 멈춰버린 냉전의 박물관, 또는 게임의 시뮬레이션화한 모습을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마주보는 거울 가운데 있는 상이 무한히 쌍방으로 재생산된 것 같은 인상도 받았습니다. 그래도 한일 지식인들이 연대하여 뭔가 이 괴상망칙한 동아시아의 애물 덩어리를 치워버릴 길은 없을까요?
오에 선생 작품속 전쟁 체험 공감
오에=공감합니다. 루이스 캐롤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를 떠올리게 하는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휴전상태가 반세기나 지속되고 있고, 유엔군과 북한군이 대치하고 있는 장소에 서 있으니 무겁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이라는 큰 상처가 동아시아에서 아직 아물지 않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남북 분단의 현실은 틀림없이 한반도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일본인에게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언제나 동아시아의 역사를 긴 안목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해왔어요. 과거 뿐아니라 미래에 대해서도 긴 안목이 필요합니다. 긴 시간의 관점에서 미래를 생각한다면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지요. 근시안적이고 짧은 안목이나 일본의 이해관계와 같은 것을 넘어서서 판단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10년, 20년 앞을 생각해볼 때 한반도의 분단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고, 그래야만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일본인들은 잘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백낙청 선생으로부터 북한 작가에 문학상을 주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북쪽 작가와 남쪽 작가의 작품이 함께 일본에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백 선생이나 황 선생이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지식인의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황=분단 극복을 위한 양국 지식인의 연대와 관련해 한가지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본의 작가, 지식인들은 70·80년대에 여러가지 방법으로 한국 민주화를 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야스에 료스케 선생이 한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으면서도 잡지 <세카이>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오랫동안 게재한 사실이 기억납니다. 일본의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은 남북을 잇는 다리 구실도 했습니다. 남북작가회의도 16년 전에 일본을 통해 북쪽에 의사를 전달하면서 제3국 또는 판문점 회의를 제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양국 시민단체와 지식인의 연대가 유지되고 발전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일본 시민, 지식인들과 북한과의 관계에 다리를 놓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본 사회가 갈수록 우경화하고 있지요. 지난해 신주쿠 거리를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길가에서 서명을 해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보니 납치와 관련된 것이었어요. 내가 한국 사람이라고 했더니 소매를 잡으면서 그러니 더 해야 한다고 그들은 간청했지요. 하는 수 없이 호적 이름으로 서명을 해주고 돌아설 때 씁쓸했습니다. 너희는 과거 식민지 시절 일본군위안부나 강제징용 등으로 수십만명을 잡아가놓고 겨우 몇명 가지고 호들갑이냐고 말할 것은 아니지요. 수십만명이나 수십명이나 사람을 납치하는 짓은 반인륜적인 일입니다.
다만 지난 냉전시기는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상태나 다름없었어요. 한반도를 둘러싸고 소리없는 냉전 속의 전쟁이 어둠 속에서 계속됐습니다. 한-일관계를 위기로 몰고갔던 김대중씨 납치사건 따위도 그런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은 모두 알려진 사실이지만 남파와 북파 무장 공작원의 작전은 수십년 동안 거의 일상이었습니다. 한·미·일은 그런 어둠 속의 전쟁에서 서로 공조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미군 기지가 일본열도 전체에 있었고 현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납치 사건은 이런 시기에 벌어진 불행이었지요. 북한과 일본은 아직도 전후처리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관계정상화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전에 일본 지식인이 남한 민주화를 도운 것처럼 북한과 일본의 관계 정상화를 위해 우리도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리를 놓는 식으로 일본 지식인들과의 연대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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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손님’ 강한 목소릴 갖고 있어요, 한국전쟁 다면적 포착 깊은 감명 받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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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중요한 얘기입니다. 납치는 지금 일본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일본 지식인은 납치문제도 당연히 해결해야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 북한과 일본의 우호관계가 형성되도록 한다는 전망을 가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내가 긴 안목으로 한반도, 동아시아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 의미지요. 황 선생이 얘기한 것과 같은 다리놓기는 훌륭한 생각입니다. 그런 구상이 실제 진척되면 나도 일본 지식인으로서 가능한 게 있다면 참여하겠습니다. 지난번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한국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요청으로 내 메시지가 전달된 일은 북-일을 잇는 시민사회의 첫번째 작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황=올해가 해방 60돌, 한-일 국교정상화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우정의 해로도 정했지만 일본에서 과거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역사인식을 둘러싸고 양국 사이에 마찰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경화하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가 바로 태풍의 눈인데요.
오에=먼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2002년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얼마전 노무현 한국 대통령이 지적한 것은 매우 합당한 것입니다. 양국 정상이 똑같은 말을 했어요. 일본의 총리, 일본의 수뇌부가 국가·역사의 과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물은 것이지요. 두 정상은 일본이 반성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야스쿠니에 가지 않겠다고 명언하진 않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응당 참배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였어요. 그런데 참배를 함으로써 그것을 배신했지요. 그것은 일본이 거짓말을 한 게 됩니다. 그래서 한·중에서 반발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일본인은 몇번이나 사과해야 하느냐는 불만을 터뜨리는데, 침략전쟁이 잘못됐다는 태도를 계속 유지하고 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본이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럽다면 한·중으로선 몇번이고 확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입니다. 주변국에서 얘기를 하니까 야스쿠니나 교과서 문제를 생각할 게 아니라, 일본인이 주체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살아가기 위해 군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정부에 얘기해야 합니다. 일본인은 정치가, 특히 총리의 모순된 말을 부끄럽게 여겨 분노해야 하며, 일본이 말한 것을 지키지 않는 데 대해 일본인이 총리에게 항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본인도 미래를 위해 책임지는 사람들이라고 아시아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겠지요.
그리고 외국에서 일본의 우경화 지적이 제기됐을 때 정치가의 망언과 같이 그런 인상을 주는 행동들은 있었지만 지식인이나 일반 시민들 사이에선 태평양전쟁에 대한 반성을 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본의 진지한 부분은 우경화하지 않았다고 지난해까지 대답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올해 들어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는 느낌이 들었어요. 지식인들이 그런 경향을 더욱 민감하게 포착해 반대해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동적 교과서 채택 문제 등에서도 지금까지는 일선 교사들의 저항이 성공했어요. 그러나 올해 도쿄도 등이 반동적 애국 교육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앞으로 학부모와 교사 등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하지요. 올해와 내년이 일본 사회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이는군요.
평화 깨는 개헌 국민투표로 저지 낙관
황=나도 문예단체의 장을 맡고 있어서 당연직으로 한·중·일 역사교과서 개정 시민연대기구의 공동대표로 이름이 올라 있지만 집필이 바쁘다는 핑계로 열성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나 중국 쪽에서 열을 내야할 것이 아니라 일본 시민들이 주도해가야 하지않나 생각되는 면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니컬하게 “역사를 왜곡하면 후대가 미망에 빠지고 그것은 새로운 불행의 시작인데 일본 사정이 아니냐, 차라리 그냥 내버려 두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저는 요즈음 동아시아에서 촉발된 민족주의 내지는 국가주의 열풍을 매우 염려스럽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독도 문제라든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 등은 차치하고라도 이를테면 작년 12월 일본 쪽의 주적선언인데요. 일본은 중국을 주적으로 선언했지요. 그리고 곧 뒤이어서 지난 2월에는 주적을 ‘중국과 북한’으로 다시 선언했습니다. 사정을 좀 아는 이들은 이것을 미국의 중국 견제라는 정책의 반영으로 보고 있거든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국가간 패권주의가 자리를 잡지 못하도록 해야 되겠지요. 선생은 ‘헌법 9조의 모임’ 활동을 통해 평화헌법 개정 반대운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에=헌법 9조를 지키자는 게 모임의 취지입니다. 집권 자민당은 전쟁을 금지한 9조의 1항은 유지한 채 군사력 보유를 금지한 2항을 없애려 하고 있지요. 군사력을 갖고 있더라도 전쟁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한 것은 지금 헌법에서 보더라도 사실상 전쟁을 하고 있는 셈이지요. 헌법에는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이라는 두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지금 일본은 자위대라는 대규모 군대를 갖고 있고 미-일 동맹을 통해 군대를 사용하려 하니 헌법규범을 지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헌법을 개정해버리면 자위대는 완전히 군대가 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9조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작가나 평론가 등이 모이게 됐지요. 재미있는 것은 모임의 활동을 언론에서 거의 보도를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데도 실제 집회에 가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지난 1년 동안 3만명 정도가 동원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집회에 참가했어요. 30일 1만명 규모의 집회를 준비 중인데 1천엔 하는 입장권이 벌써 9천명분 팔려나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목소리는 일본의 우경화에 반대하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애들에게 이상한 애국교육을 시키고 싶지 않다는 학부모들과 진지한 지성인들이 모일 것입니다. 나도 이들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가하는 것입니다. 나는 낙관적입니다. 국회 의원들 가운데는 개헌 지지파가 3분의 2를 넘어 개헌안이 국회에선 통과될지 모르지만, 헌법개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면 그것을 뒤집을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바뀌지 않을 것이며,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다고 해도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이지요. 개헌 여부에 관계없이 일본의 우경화, 반동화는 계속된다는 것이지요. 그런 흐름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바꿀 것인가가 우리가 가장 고민해야 할 점입니다.
황=한국 사회는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된채로 식민지 잔재와 군사독재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그리고 식민지 근대화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해방이 주어졌을 때 전근대적인 봉건적 농업사회였지요. 우리는 피땀으로 현재의 생활 근거와 민주적 사회를 쟁취해냈고 어느 면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남북한 간에 정통성 논쟁을 하는 것을 가장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무슨 근대화 세력이 있어서 경제적 형편이 피어난 게 아니라 당대의 민중이 허리띠 졸라매고 이루어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제 겨우 정통성이며 자주적인 역량이 생겨났다고나 할까. 미국과 일본의 정치 현실을 보면서 저 성실하고 정직한 시민들이 ‘부시와 고이즈미를 선출했다’는 것이 불가사의했지요. 그러나 정치권이 애초의 개혁적인 꿈에서 차츰 멀어지면서 현실정치에 대한 냉소주의가 우리 사회에도 서서히 번져가고 있습니다. 나는 그런 면을 더욱 염려합니다. 우리는 이제 겨우 한반도를 벗어난 동아시아 시민연대에 눈뜨고 있는데 앞으로 한-일 관계가 어떻게 될 것으로 보십니까?
일 국민, 총리 모순된 말에 분노해야
오에=일본인에게 미래가 있다고 한다면 동아시아에서 유해한 나라가 아니라 필요한 나라로 인식되는 것입니다. 한국, 북한, 중국 등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게 유일한 길입니다. 북핵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일본이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시아에서 미국의 거대한 핵군사력으로부터 독립하지 않은 채 북핵 포기를 주장하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동아시아의 미래를 긴 안목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북 분단의 극복에 일본의 도움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방해가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젊은 정치가나 경제인이 우경화를 주도하고 있는데 여기에 일본인들이 시민의 힘으로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일본의 미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한가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세계에서 일본, 일본인이 어떤지를 가장 잘 아는 나라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지요. 재일동포 60만명 이상은 일본인을 속속들이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 일본인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판단을 또 한다면 한-일 관계가 제대로 될 수 없습니다. 일본인은 결코 한국인들에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지요. 말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것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일본은 고립되고 동아시아에서 미래는 없다는 것을 특히 어린이들에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지표가 야스쿠니나 교과서 문제죠. 한류를 비롯한 새로운 교류도 일어나고 있는데, 일본인은 아시아인으로서 배신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얘기이지만 죽을 때까지 지키고자 하는 나의 신념입니다.
정리·사진 도쿄/박중언 특파원
park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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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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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났다. 1962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단편 <입석부근>이, 197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탑>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대하소설 <장길산>과 장편 <무기의 그늘> <오래된 정원> <손님> <심청>이 있으며, 소설집 <객지>, 광주민주화운동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등을 냈다. 1989년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북한을 방문한 일 때문에 해외에 머물다가 1993년에 귀국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참여적 사실주의 전통에 입각해 있으면서 역사적 소재와 환상적 기법 등으로 소설 세계를 확장해 가고 있다. 만해문학상, 단재상, 대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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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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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에 겐자부로 :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나 도쿄대 불문과를 졸업했다. 1958년에 <사육>으로 아쿠타가와상을 받았다. <개인적 체험> 등의 작품을 통해 장애아 아들을 키우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화했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자신의 고향 시고쿠에 전해 내려오는 신화적 이야기들을 현대 사회의 문제들과 관련지어 재해석했다. <만연원년의 풋볼>로 1994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성적 인간> <핀치 런너 조서> <절규> 등의 작품이 있다. 정치적 메시지와 사실주의적 문체 등에서 일본 문단의 지배적 조류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1970년대에는 김지하 석방운동에 힘을 쏟기도 했으며, 지금은 ‘전쟁 포기’를 명기한 일본 헌법 제9조를 지키는 운동에 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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