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7 18:39
수정 : 2005.08.1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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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달항아리(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장 널리 알려진 명품으로, 말린 아가리의 입술, 따스한 빛깔, 몸체의 소탈한 곡선이 돋보인다.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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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덕한 어깨·허리 단순한 순백
“아름다움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둥글다 해서 다 같지가 않다. 그 흰 빛깔이 모두가 다르다. 단순한 원형이, 단순한 순백이, 그렇게 복잡하고, 그렇게 미묘하고 불가사의한 미를 발산할 수가 없다.…싸늘한 사기지만 살결에는 다사로운 온도가 있다.…내가 아름다움에 눈뜬 것은 우리 항아리에서 비롯되었다.…”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뜨겁고 감미로운 헌사를 오롯이 조선 백자 달항아리에 바친 이는 누구일까. 그는 한국 현대미술의 한 봉우리이자 멋쟁이 예인으로 이름 높던 화가 수화 김환기(1913~1974)였다. 아내 김향안의 회고록 <사람은 가고 예술은 남다>를 보면 수화가 사랑했던 것은 자기 팔로 안아서 한아름 되는 유백색 대호(달항아리)였다고 한다. “때로는 마당에 내다가 여섯 개의 각이 진 초석 위에 올려놓고 바라보다 뙤약볕을 피해서 그늘에 옮겨놓고, 그 항아리들은 김환기에게 있어서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았다.”
‘목화처럼 다사로운 백자, 두부살 같이 보드라운 백자, 쑥떡 같은 구수한 백자’ 등으로 표현하며 애지중지했던 달 항아리는 그가 그린 저 유명한 50~60년대 자연 연작에서 산, 새와 함께 핵심 제재이자 영감의 원천으로 자리잡는다. 파리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여전히 항아리를 그리고 있는데 이러다간 종생 항아리 귀신만 될 것 같소”라고 밝히고 있다. 실제로 외면되었던 달 항아리의 미학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 멋진 이름을 유행시킨 것은 김환기와 친구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최순우의 우정어린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후대 사가들은 전하고 있다.
달항아리는 숙종 시대인 17세기 말부터 영정조시대인 18세기 백년도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반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높이 40cm 이상으로 최대 지름과 높이가 거의 1대1 비례를 이루고 몸체가 원만한 원형을 이룬 이 대형 항아리는 워낙 크기 때문에 하나의 모양을 짓지 못하고, 윗쪽과 아랫쪽 부분을 따로 빚어 접붙여 만들었다. 그래서 허리께에 대개 이음자국이 보인다. 최순우가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후덕함이라고 극찬했던 대로 항아리의 매력은 깔끔한 정형이 아니라 어딘가 이지러진 듯한 자연미에서 나온다. 중력으로 무너지려는 백토의 힘과 원만한 모양을 쌓아올리려는 도공의 의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산물인 셈이다.
하지만 조선시대는 물론이고 일제시대까지도 학자와 문인들은 달항아리에 대한 감평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날렵한 대칭과 깔끔한 몸체의 중국 일본 도자 미학에 익숙한 탓에 인공적 정제를 피하고 자연미를 존중한 달항아리의 미를 절실히 느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시골 장터에 모인 아낙네들의 흰옷 입은 군상이 생각난다”던 최순우의 회고대로 달항아리는 국권을 찾은 뒤 민족의 성정과 문화에 대한 자각 덕분에 재조명된 셈이다.
18세기에 반짝했다 이후 생산이 끊긴 달항아리는 도자사의 계보에서도 배경이 명확치 않다. 방병선 고려대 교수는 <조선후기 백자연구>에서 당시 조선색이 강조되던 문화 중흥기 사대부들의 호방한 심미관을 좇아 주역의 태극을 형상화한 감상용으로 나왔으리란 가설을 내놓았다. 백자 기형 중에 달항아리만큼 상하좌우의 몸체가 천지 음양의 조화를 이룬 것이 드물기 때문에 태극 형상을 입체화하는 데 적합했을 것이란 추론이다. 제작 기법도 서민들이 주로 쓰던 옹기 기법까지 빌려 쓰면서 심미안의 발전 등과 어울려 18세기 대표적 도자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명저 <조선과 그 예술>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동서를 막론하고 시대가 내려오면 기교가 복잡도를 더한다…그런데도 실로 흥미 깊은 예외를 조선의 도자기 공예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아룸다움은 단순으로의 복귀다.…자연에 대한 신뢰야말로 조선 말기 예술의 놀라운 예외가 아니겠는가.”
15일 개관한 국립 고궁박물관에서는 이 달항아리 명품 9점을 특별 전시중이다. 개관일 광화문 앞까지 관람객이 줄을 서 관계자들을 놀라게 한 이 전시에서는 공모를 받아 보물 지정된 개인 소장본품 국립중앙박물관·브리티시 박물관 소장품, 깨어졌다 복원된 일본 오사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 모범생 같은 리움 미술관 소장품 등을 비교해가며 볼 수 있다. 백미는 중앙부에 홀로 놓인 개인소장품. 한국 미술 오천년전에 출품되었던 이 달항아리는 은행알처럼 예각으로 정리된 아가리와 후덕한 어깨·허리 모양 등이 인상적인 걸작이다. 전시장 벽에는 고고미술사학자 삼불 김원룡의 ‘백자대호’란 시가 붙어 있는데, 반협박 조(?)의 시구에서 달항아리의 무심한 미학에 더욱 공감하게 된다. “…원은 둥글지 않고 면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 돌리다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 게 아니오…/ 무엇 새삼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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