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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훼손된 혜초 기념비의 뒷면. 온통 낙서와 짓이긴 흔적 투성이여서 상당수 글자를 읽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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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황제 칙령받아 기우제 드리니 비단같은 비가 주룩주룩
혜초의 신통력 세월에 잊혀진듯 기념비는 누더기로 변해
8세기 신라 고승인 혜초(?~?)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개 인도와 실크로드 여행기인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라는 정도가 고작이다. 밀교의 대가로 중국에서 추앙받으며 황제의 칙령을 받아 기우제를 지내고 당대의 학승으로 밀교경전을 번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한겨레> 특별기획으로 7월 중순 문명사가 정수일 교수와 함께 떠난 실크로드 답사기행의 출발지격인 중국의 고도 시안(옛 장안)에서 우선 가야할 답사코스로, 혜초가 당나라 황제의 명으로 기우제를 지낸 유적 기념비를 택한 것은 그의 다른 행적을 더듬고픈 까닭이 있었다.
대력(당나라 대종의 연호) 9년인 774년 2월5일, 10년간의 인도유학길에서 돌아와 고승이 된 혜초는 대종 황제의 칙명을 받아 오늘날 시안 서남쪽 교외의 선유사터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옛 도읍 장안의 사적을 적은 <장안지>를 보면 이곳은 주지현 영내로 장안의 독북에서부터 130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흑수’라고 불리우는 강가의 옥녀담이라는 곳에서 그는 바위 위에 올라 비가 내리게 해달라고 주술을 외며 발원했다고 전해진다. 혜초가 기우제를 올린 뒤 효험을 적은 보고서인 <하옥녀담기우표>가 전하는데, 주요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옥녀담에 제단을 세우고 향을 피우자 우주삼라만상을 관장하는 하늘이 대종의 성덕에 영묘하게 호응하여 계곡에서 소리가 났다. 사리를 던졌더니 비단 같은 비를 만족스럽게 뿌려주었다…짐작컨대 미물의 작은 정성 때문이 아니라 하늘이 성은에 감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혜초의 기우제를 상세히 고증·해설한 역사학자 변인석 아주대 교수의 <당 장안의 신라사적>(아세아 문화사)을 보면 당나라에서는 가뭄이 심할 때 각 사찰로 공덕사를 보내어 비 오기를 비는 격문을 외우도록 명령을 내리며 ‘달달 볶았다’고 한다. 더욱이 혜초의 기우제는 단순한 발원행사가 아니라 황제의 직접 명령을 받아 준비하고 결과까지 보고하는 범 국가적 행사였기 때문에 규모와 관심이 대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비한 주술로 불법을 실행하는 밀교 고승들이었기 때문에 신통력에 대한 기대감도 컸을 것이란 얘기다. 다행히 혜초의 신통력(?)은 살아있어 기우제는 흡족한 성과를 올렸고, 혜초의 법력은 더욱 더 세간에 오르내렸을 것임에 분명하다.
현재 옥녀담의 기우제 현장은 불어난 물 속에 잠겨있다. 흑수에 90년대 중반부터 댐이 건설되어 절터와 강변 자체가 수몰된 까닭이다. 다행히 2000년 대한 불교 조계종과 변인석 교수가 중국 당국의 협조를 받아 옥녀담 제사터에 있던 거북바위를 인근 언덕에 옮기고 그 옆에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와 비를 보호하는 정자(비각)를 세워놓았다.
‘금분수고()’라고 이름붙은 수몰 저수지 관리소를 지나 가랑비 흩뿌리는 가운데 들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들판 가로질러 비각으로 갔다. ‘신라국고승혜초기념비’란 제목의 비를 둔중한 거북이상(귀부)이 짊어진 전형적인 비석 모양이다. 비석 뒷면에는 ‘혜초 약전’이라 하여 혜초의 생애와 기념비 조성 경위를 쓴 찬문이 적혀 있다. 정자 현판에는 ‘신라국 대덕고승 혜초 기념비정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이란 글씨와 대통령의 낙관까지 찍혀 있었다. 당시 우리 정부도 혜초 기념비 건립 사업에 ‘슬쩍’ 관여했던 모양이다. 비각 옆에는 옥녀담에서 유일한 바위 제단터임을 고증해 직접 가져온 거북이 모양 바위가 놓여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수몰된 계곡과 절터의 전망은 뿌연 안개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초행자의 눈에도 전망이 탁트이고 성스러운 느낌까지 들게 했다. 고구려와 전쟁을 벌인 수나라 문제는 이곳에 피서 행궁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기념비의 훼손이 매우 심각하다는 점이다. 세워진 지 5년밖에 안되었는데 비석 앞 뒷면은 온통 낙서와 돌로 갈아버린 자국 때문에 누더기처럼 변했다. 건립 뒤 곧장 마을 아이들 놀이턱 전락한 탓이다. 간이 관리인이라는 규창핑 스님은 “기념비 사업에 정부 당국에서 1000만원 이상의 거금을 내린 것으로 알고 있으나 현장에서 집행된 적이 거의 없다”며 “마을 주민들도 비각의 의미를 모를 것”이라고 말한다.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풀 숲에는 일본 오사카의 한 서예가가 이 지역 서화가들과의 교류를 기념해 2003년 세웠다는 기념비석이 생뚱맞게 서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왜 혜초 기념비 옆에 일본인들이 비각을 세웠을까. 스님이나 주민들도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고 했다. 혜초는 기우제를 지낸 뒤 중국 오대산 건원보리사에 들어 경전을 연구하다 결국 이국땅에서 세상을 떴다. 도리천에 있을 그의 영혼은 기념비의 참상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시안/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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