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31 18:17
수정 : 2005.08.3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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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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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마시라 계몽의 시대는 지났다
나는 ‘별’이 무섭다. 요새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내가 다니던 시절의 초등학교 교사들은 숙제 검사를 하건 일기장 검사를 하건 틈만 나면 꼭 평가의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바로 별이었다. 별 모양 도장이 몇 개 찍히느냐에 따라 아이들의 과제물은 다섯 개의 등급으로 나누어졌다. 별 다섯 개를 받은 아이와 별 한 개를 받은 아이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있다고, 그렇게 믿어지던 시절이었다. 매일매일 건실하게 써온 동생의 일기장을 원본 삼아 두어 시간 동안 뚝딱뚝딱 지어낸 내 한달치 일기는, 자주 별 다섯 개를 받았다. 반면 이를 악물고 죽어라 열심히 그려간 포스터는 잘해봐야 겨우 별 두 개를 받았을 뿐이다. 별을 받아들 때면, 그 별점이 예상보다 높든 낮든, 가슴 한구석이 휑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밤하늘에 반짝이던 별은 언제부터인가 지상에 내려와 ‘점수’가 되었다. 요즘엔 특히 문화텍스트를 평가할 때 유용한 방법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영화잡지의 지면이나 포탈사이트의 영화 디렉토리, 인터넷서점의 독후감란 같은 곳에서도 흔히 별들의 행진을 만나게 된다. 별보다 더 두려운 건 ‘손가락’ 이다. 별은 그나마 (대개)다섯 등급이기나 하지, 손가락이 의미하는 바는 딱 두 가지 뿐이지 않은가. 올라가 있거나, 내려가 있거나. 즉 좋거나, 좋지 않거나! 내가 궁금한 건, 좋다고 치켜 올리거나 좋지 않다고 바닥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이 과연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극찬하며 다섯 개를 선사하거나, 야박하게 한 개를 때리는 별점평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평론가 혹은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그들. 똑같이 영화 한 편을 보았을 뿐인데, 평소 얼마나 내공이 쌓였으면 저렇게 확신에 찬 손가락질을 할 수 있는지. ‘별 한 개도 아깝다’ 따위의 촌철살인(?)을 곁들일 수 있는지. 그 자신감과 용기가 부럽기도 하다.
이 지면을 빌어 그분들께 짧은 질문 하나를 드리고 싶다. 정말로 궁금해서 하는 말인데, 당신에게 ‘좋다’의 반대말은 ‘싫다’ 인가, ‘나쁘다’ 인가? 주지하건데 ‘싫다’와 ‘나쁘다’는 엄청나게 다른 말이다. ‘싫다’는 것은 주어의 주관적 감상을 전면에 드러내는 형용사이며, ‘나쁘다’는 것은 객관적 근거에 의거한 윤리적 판단의 표현이다. 타인의 문화적 텍스트에 대한 것이라면, ‘좋다’의 반대말은 당연히 ‘싫다’ 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상식이다. 그러니까 <그 영화 별로다>라는 문장의 앞뒤에 생략된 말은, <나는>과 <-라고 생각한다>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세간에 넘쳐나는 ‘별’과 ‘손가락’의 행진들을 보고 있으면 이 단순하고 자명한 상식에 의거한 신념이 뿌리째 흔들린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비평 읽는 일이 두려워졌다. 내가 좋게 본 영화나 책에 대해서라면, 특히 그렇다.
물론 비평 또한 고유의 창작 영역에 속하는 게 틀림없지만, 내 주관적 견해로 말하자면 타인의 텍스트가 거기 존재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있을 수 없는 게 비평가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부탁드린다. 제발 쉽게 가치판단하지 마시라. 당신의 판단기준은 당신 눈에만 옳을지도 모른다. 계몽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으니, 부디 남을 함부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지 마시라. 텍스트 생산자는 당신의 ‘권위 있는’ 한 마디에 제 모자람을 깨닫고 회개하는 어린 양이 아니다. 문화 텍스트에는 정답과 중심이 없다. 그러니 무언가를 ‘읽는다’는 행위는 어차피 오독을 한다는 뜻이다. 자기 취향을 이념화시키고 절대화시키는 비평이 아니라 ‘내 오독의 가능성’ 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비평, 텍스트의 쉼표와 말줄임표, 숨결을 섬세하게 읽어주는 비평을 기다린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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