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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카 회사 엡솔루트의 미디어 전 ‘메트로폴리스’에 출품한 한계륜씨의 미디어 작품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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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모델하우스…거장들 작품 내걸어 구매력 높은 고급고객 겨냥 고도의 상술인듯
지난달 서울 명동 들머리에는 초현실주의 화가 마그리트의 초대형 명화가 내걸렸다. 하늘에서 집들 위로 빗방울 떨어지듯 중절모 쓴 신사들이 둥둥 떠다니는 1953년작 <겨울비(골콘다)>다. 물론 진짜는 아니다. 리노베이션 공사중인 신세계 백화점 본점 외벽을 덧씌운 대형 알루미늄 보호벽에 50여 년전 명작을 확대해 입힌 복제 그림이다. 프랑스미술저작권관리협회쪽에 무려 1억원의 저작권료를 내고 이 작품을 1년간 복제 설치하기로 한 백화점쪽은 “고객과 다수 대중들에게 문화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차원”이라고만 했다. <골콘다>외에도 지난달 10일 개관한 19층짜리 백화점 신관에는 ‘문화 백화점’이란 컨셉으로 무려 150여 점이나 되는 국내외 저명 작가의 미술명품을 현관부터 매장, 공중정원까지 곳곳에 장식했다. 움직이는 조각으로 유명한 칼더, 독일 대가 안젤름 키퍼, 최정화의 설치작업, 재미조각가 존배의 중후한 브론즈 조각 등 면면도 화려하다. 백화점쪽이 밝힌 구입, 설치비용은 50억원. 본관 내 100여 평 규모의 화랑 개관, 10월 예정한 경매사 소더비와 한국근현대미술 경매 경매전 등의 굵직한 미술사업계획도 곁들였다. 사실 이 아트 마케팅은 몇달 전 라이벌 롯데가 선수를 쳤다. 올봄 패션 아트 복합공간을 표방하며 개관한 10층짜리 대형 명품관 애비뉴얼은 갤러리 스타일의 독립 매장과 9층의 대형 전시장, 2층의 미니 갤러리 등을 갖춘 럭셔리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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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많은 기업들 ‘미술 마케팅’ 공세 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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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 기업자본들의 미술 마케팅 공세가 거세다. 전시 협찬 등 메세나나 패션브랜드 쌈지처럼 중소기업들이 예술디자인을 상업화한 사례는 90년대부터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최근 아트마케팅은 ‘돈질’의 규모가 틀리는 대기업이 주도하며 뚜렷한 고객들의 문화 수요까지 겨냥하면서 환금가치를 교묘하게 계산한다는 점이 다르다. 구매력 높은 고급 고객을 겨냥한 고도의 상술인 셈이다. 롯데 건설은 최근 마포구 공덕동 고급아파트인 롯데캐슬 프레지던트 모델 하우스에 비디오 아트 거장 백남준씨 작품 20점을 무려 30억원 이상의 보험료를 주고 전시중이다. 90년대부터 유럽 주요 박물관 등에서 신제품 발표 행사를 벌였던 삼성전자는 올 3월부터 세계 유수의 미술관인 뉴욕현대미술관(모마)의 전시에 홈시어터 디브이디 등 디지털 영상 제품을 내놓고 디지털 아트 영상물 상영을 협찬했다. 외국기업들의 꾸준한 마케팅 전술도 심화되어 간다. 스웨덴 보드카 제조업체인 앱솔루트는 지난달 26일 청담동 화랑들의 미술잔치로 개막한 청담미술제 특별전인 거리미디어 전을 진행했다. ‘메트로폴리스’란 이름이 붙은 이 행사에서 앱솔루트쪽은 일본 도쿄에서 진행한 패션 리더 광고 시리즈를 틀고 정영훈, 한계륜, 양만기씨 등 영상작가들의 작품 전시도 후원했다. 또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 에르메스는 최근 청담동 갤러리아 백화점 매장에 도시를 화두 삼아 작업하는 진보적 작가 그룹인 플라잉시티의 퍼즐 로봇 작업들을 윈도 갤러리에 전시중이다. 미술에 대한 대자본의 열띤 구애는 어떤 배경이 있을까. 유통 관계자들은 최근 3~4년간 극심한 내수 경기 부진에 따라 멋을 찾고 호기있게 돈을 쓸 줄 아는 유한 명품족을 겨냥한 문화 포장 마케팅이 부각된 것이라고 말한다. 경기 잘 안타는 패션명품과 어울리는 미술품 마케팅이야말로 판촉과 브랜드 이미지 상승의 두 토끼를 잡는 비결임을 뒤늦게 감지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환금가치에 눈독 들이다 보니까 마케팅 작품들의 예술적 가치나 작품들 사이의 맥락에는 관심 밖이라는 것도 감지된다. 신세계 신관만 해도 150여 점의 작품들을 한데 묶는 컨셉 개념은 거의 없으며, 정문쪽에 천덕꾸러기처럼 방치된 느낌을 주는 존배의 조각, 회전문에 끼여 본디 메시지를 잃어버린 데비한 등 젊은 작가들 작품 등을 보면 그런 느낌이 여실하다. 한 전시기획자는 “대기업의 아트 마케팅은 대중 고객층 사이에서도 기업들이 눈독들일 정도로 미술에 대한 인식과 감각이 새로 형성되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며 “이런 변화를 미술판이 능동적으로 이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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