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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8.31 21:18 수정 : 2005.08.31 21:18

시안부 함녕현 흥교사 서쪽 후원에 있는 신라 고승 원측의 사리탑. 북송 때인 1115년 종남산 풍덕사 탑에 있던 원측의 사리 일부를 가져와 현장과 규기의 탑 옆에 나란히 지었다. 현재 중국에서 이름이 확인되는 신라 고승의 유일한 묘탑이다.

서유기 현장과 더불어 중국 불교사 한 획 그은 신라 왕손인 고승 원측 이국땅에서의 ‘수구초심’ 탑의 자태에서 읽늗다

우리 민족사에서 유라시아를 누비며 한민족의 얼을 흩뿌린 세계인은 누가 있을까. 많은 이들은 고구려인 출신으로 서역을 평정한 대장군 고선지와 <왕오천축국전>의 저자로 인도를 다녀온 혜초를 기억한다. 그러나 어찌 그들만일까. 정수일 교수와 함께 한 <한겨레> 실크로드 답사기행에서 답사단은 또 한 사람의 신라 고승이 당당한 세계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7세기 당나라에 유학해 중국과 서역의 불교사상사에 발자취를 남기고 현지에서 세상을 뜬 고승 원측(613~696)이 그 분이다. 사서와 중국쪽 불교 관련 문헌기록을 보면 그는 경주 모량부 출신의 신라 왕손으로 아기 왕자 때인 3살 때 출가해 15살 이전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난 총명한 승려였다. 일찍부터 어학에 밝아 범어(산스크리트어) 등 6개 국어에 통달했던 그는 인도의 불경 번역과 해석에 전념했다. 특히 그는 서역여행기인 <대당서역기>의 저자로 유명한 현장과 더불어 불교학의 핵심인 유식사상(법상종)을 일으키면서 불교사의 한 봉우리로 우뚝 서게 된다.

그의 자취는 옛 장안인 중국 시안 교외의 사찰 흥교사에 있다. 이곳은 원래 669년 현장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워진 절로 원측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현장의 삼장탑, 규기 스님의 기사탑과 함께 나란히 서있다. 절은 시안 시가에서 남동쪽으로 30여분 정도 차를 타고 백양나무 가로수가 있는 한적한 시골길을 달리면 나오는 야산 어귀다. 흥교사 현판이 걸린 삼문을 지나 들어간 절은 중창불사 하느라 못질, 전기 톱 소리가 요란하다. 이끼 낀 미끄러운 보도를 지나 절 건물 왼편에 자리잡은 숲 속에 이들 세 고승의 탑이 사이좋게 서있다. 가운데 가장 높은 10여m의 현장 스님 삼장탑을 중심으로 양 옆에 나란히 규기와 원측의 탑이 있다. 원측의 탑은 3층짜리 아담한 탑으로 1층에 원측의 진흙상이 모셔져 있고 2층 중간에 ‘측사탑()’이란 새김글이 보인다. 대충 봐서는 스승격인 현장을 중심으로 양대 제자뻘인 규기와 원측의 공덕을 기리려 지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교사 기록들은 사이좋은 탑 모양새와는 반대로 규기와 원측이 불교학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대결을 벌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섬뜩함마저 느껴좌 규기와 원측의 갈등은 645년 현장이 인도에서 갖은 곡절 끝에 대승불교의 새 경전들을 들고 극적으로 귀국하면서부터 비롯된다. 외국어에 천재적인 능력을 지녔던 원측은 <유가론> <성유식론> 등 현장이 가져온 새 경전의 범어 글귀들을 누구보다 빨리 이해하고 가장 앞서 이들 경전의 주석서를 발표하며 해석을 선도했다. 당연히 현장의 수제자였던 규기 일파로부터 혹독한 모함과 시기가 돌아왔다. 후대에 중국 사서인 <송고승전〉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장 스님이 불경을 처음 옮겨 강론장에서 소개할 때 원측이 문지기를 구슬려 강론장에 몰래 들어가 엿듣고 의장()을 꾸민 것이다.” 뇌물을 주고 도둑처럼 강의실에 들어가 현장의 지식을 가로챘다는 말인데, 현재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이 대목을 규기 일파의 조작으로 보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만큼 원측 스님의 불교학 실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로 보는 것이다. 현장이 수입해온 것은 만물의 존재적 본질을 인식하는 방법을 찾는 관념 철학인 유식학, 곧 법상종이었다. 중국 불교사의 뼈대가 되는 이 종파의 주도권을 놓고 규기는 줄곧 원측 스님을 이단으로 몰려 했다. 깨달음을 얻는 이는 본래 제한되어 있다는 규기파의 배타적 학설에 맞서 근기에 따라 수행하면 모든 중생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등수행론을 역설한 원측의 사상은 날카롭게 부딪혔다.

흥미로운 것은 이후 규기파의 견제로 중국에서 원측의 사상은 뿌리를 뻗지 못한 반면, 제자들에 의해 신라와 서역 티베트로 전해져 흥성했다는 점이다. 제자 담광이 원측의 저서〈해심밀경소>를 서역 둔황으로 가져가 티베트어로 번역하고 티베트의 서장대장경에 그의 저술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을 생불로 받든 측천무후의 만류로 귀국하지 못했지만 신라에서도 도증 등의 귀국 제자에 의해 법상종을 뿌리내리는 비조가 되니 서역과 신라에 불교사상을 전파한 주역이 된 셈이다.

지붕이 잡풀에 덮인 채 숲에 가려진 원측의 탑은 낡았지만 단호한 권위가 서려있다. 사찰 안 매점에서 우락부락 기골이 장대한 원측 소상의 탁본을 보았던 것을 기억하면서 탑을 둘러본다. 누군가 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종이쪽이 뒷면에 붙어 있다. 이국 땅에서 시기에 시달린 그 또한 고향 경주를 절절이 그리워했으리라.

시안/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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