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07 22:07 수정 : 2005.09.07 22:07

한락연이 그린 키질 석굴의 불교 벽화 모사도. 설법하는 보살상과 기악비천상을 그렸다.

조선족출신 중 혁명예술가 키질·둔황 벽화에 숨결 묻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락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 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20세기 초 중국의 저명 미술인 청청은 조선족 화가 한락연(1898~1947)이 그린 쿠차 실크로드 벽화의 모사도 전시를 보고 나서 이런 평문을 남겼다. 글 속의 변방동포는 화가 한락연이 조선족임을 암시하는 구절이었을 터다.

청청의 찬사처럼 화가 한락연은 우리에겐 낯설지만 중국 미술계에서 근대 양화의 대가,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미술사 책마다 언급되는 대가다. 중국 연변에서 태어나 중국 본토와 유럽을 누비며 화업을 닦았으며 40년대엔 서역 문화유산을 조사하는 데 여생을 바쳤다. 연변 출신의 그가 무슨 까닭으로 정반대쪽 실크로드 문화유산의 지킴이가 되었던 것일까. 조만간 <한겨레>에 연재될 정수일 교수의 실크로드 답사 특집 팀이 신장성 쿠차의 벽화 유적을 답사하던 길은 또한 20세기초 유일하게 서역을 누빈 한국인이던 한락연의 자취를 더듬는 길이기도 했다.

서역 음악의 본고장인 쿠차는 기원전후부터 실크로드 교역의 중심지였고, 당나라 때는 안서도호부가 설치되어 고선지 장군이 서역 정벌 본거지를 두었던 곳이다. 한락연의 숨결 묻은 키질 석굴은 쿠차 시가에서 70여 km 떨어진 산악 계곡 속에 있다. 쿠차 시가에서 출발해 텐산 산맥의 지맥을 보면서 협곡의 지세를 물결치듯 타넘는 이차선 가도를 가로질러 1시간 여를 가면 석굴 공원이 나타난다. 그랜드캐년 같은 웅장한 협곡과 소금 강이 흐르는 계곡을 지나는 길은 서유기의 모험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이 지역 출신으로 불경을 번역한 고승 구마라지바의 동상이 서있는 공원 들머리를 지나 석굴로 오르니 감각적 색조에 입체감 뛰어난 천불, 보살상 등의 환상적 이미지들이 눈을 때린다. 한락연의 자취는 그가 발견한 10굴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굴 벽에서 이목구비 뚜렷한 그의 액자 초상과 조사 때 와서 손수 남긴 글들을 볼 수 있다.

“1946년 6월 5일에 도착하여 벽화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꼈다. 거기에는 고상한 예술가치가 있고 각지의 어느 동굴에서도 없는 것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는 외국의 고고학자들이 떼어갔다. 이것은 문화상의 커다란 손실이다… 고대 문화를 발견하고 빛내기 위해 참관자 여러분은 특히 사랑하고 보호해주기 바란다.”

한락연의 경력은 파란만장이란 말에 걸맞다. 44년 깐수성으로 거처를 옮겨 키질과 둔황 벽화를 조사하기 전까지 그는 혁명과 예술을 병행한 지사였다. 3·1운동의 영향으로 항일운동에 뛰어들어 23년 공산당에 입당한 뒤 상하이, 우한 등에서 지하조직 활동을 했으며 29년 프랑스로 유학가서 그곳의 신인상파와 다다 화풍에 영향받으며 유럽 곳곳의 미술유산을 섭렵했다. 귀국 뒤 국공합작을 도우며 선전화 등을 그리다 3년간 국민당 정부에 의해 투옥됐으며 43년 출옥 뒤 택한 길이 실크로드 유산의 연구·모사 작업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작고하는 47년 7월까지 수차례 키질과 둔황 벽화를 찾아 모사 및 발굴 연구에 매달리는데, 키질 벽화를 처음 모사했을 뿐 아니라 다른 실크로드 유적과의 차이점, 유산적 가치에 대한 논문도 먼저 발표한다. 헬레니즘풍의 감각적 회화로 인정받는 키질 석굴의 미술사적 가치를 처음 발견해내고 석굴 개수를 정리하고 번호표를 매기는 작업을 한 것은 바로 그의 업적이다. 90년대 처음 국내에 그를 소개한 권영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출옥 뒤 한락연이 서역을 향한 것은 예술을 필수품처럼 중시하되 소재주의·상업주의에 영합하는 것을 반대한 역사의식의 소산으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지금 그의 자취 어린 키질 석굴을 찾는 한국인들은 별로 없다. 관객 모집이 안돼 실크로드 투어에서 외면당하고, 어쩌다 와도 한락연의 자취를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게 현지인들의 말이다. 정수일 교수는 “추념 비석이라도 고국에서 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같이 벽화를 모사한 동료 창수홍의 전시 때 남긴 고인의 글이 여운으로 남는다. “…문명은 노력하지 않고 거저 얻은 것이 아니라 문화 전사들의 비통한 전투를 거쳐 얻은 축적이다. 이는 공유의 재산인 것이다…”

쿠차/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