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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다 우리 민화’전에 나온 개인소장의 19세기 화조도. 방울꽃, 소나무, 파초, 모란 등을 단순하고 현대적인 반추상적 구도로 변용한 것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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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 날것 그대로 녹여낸 황홀한 판타지
“나의 직관은 이 그림이 대단히 매혹적이란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무언가 신비스런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지혜를 짜서 다시 바라보니 이 그림만큼 모든 지혜를 무력하게 만드는 그림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근대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림 자체가 온통 불합리한 것들로 이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우리 민화의 미술사적 가치를 처음 밝혔던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59년 <민예>지에 기고한 <불가사의한 조선민화>에서 민화의 당혹스런 매력을 이렇게 평했다. 그의 차분한 해석은 고양이 같은 까치호랑이, 원근법이 뒤죽박죽된 책거리 그림 등의 민화 이미지들이 황홀한 팬터지임을 에둘러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나기가 표현한 민화의 이 불합리한 아름다움을 그가 세운 일본 민예관의 민화 수장품을 국내 처음 선보이는 서울 역사박물관의 ‘반갑다! 우리 민화’전(10월30일까지·02-724-0154)에서 새삼 느끼게 된다. 섬세한 선묘로 책과, 항아리, 과일 등을 기묘한 평면 구도로 짠 책가도가림병풍이나 몸에 호랑이를 휘감고 선 산신도, 입을 앙증맞게 벌린 호랑이와 까치 그림 등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다.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미학을 공부했던 야나기에게 선과 색채, 형상을 재현하는 도식을 훌쩍 뛰어넘는 민화의 천진난만한 화풍은 그가 즐겨 말한 대로 ‘불가사의’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렇다면 민화가 본격적으로 출현한 18~19세기 조선 말기 사대부 지식인들은 민화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었을까. 실학자 이규경은 그의 저술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민화에 대해 짧은 평을 남기고 있다. “여염집 병풍, 족자, 벽에는 속화가 붙여지곤 한다. 이들 그림에는 본래 뜻이 있었던 것인데 그리는 자들이 고사를 알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여기 몇가지 아는 것을 적어 알려주고자 한다…” 우리가 아는 미술사 상식처럼 당대 선비들은 민화를 속된 그림이란 뜻의 속화라고 하여 천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규경의 글은 하층민들이 다양한 인문적 의미가 깃든 고급 회화의 이미지를 의미도 모른 채 멋대로 빌려 쓰고 있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흔히 말하듯 민화의 범주에 들어가는 그림들을 상류계층에서 무작정 외면했던 것은 아니었다. 홍석모의 <동국세시기>는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에서 새해 복을 비는 그림인 세화 등을 임금에게 올리고 서로 선물했으며 여염집에서도 이를 본떴다고 쓰고 있고, 유득공도 <경도잡지>에 문자도 병풍을 상류층이 썼다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훈련도감의 연회 장면을 노래한 조선후기의 가사인 <한양가>를 봐도 이런 양상은 분명히 드러난다. ‘북일영 군자정에 한판 놀음 벌였구나/눈 같이 흰 휘장과 구름처럼 높은 차일/차일 아래…왜찬합과 당찬합과 아로 새긴 교자상/모란병풍 영모병풍 산수병풍 글씨병풍…’ 관료 계층의 연회에 우리가 오늘날 민화로 보는 그림들이 숱하게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민화를 18~19세기 서민들, 혹은 민중들의 것으로 양반 계층에 대한 풍자와 해학을 담은 그림이라고 넘겨짚곤 하는데, 실제로 이와 달리 민화는 계층을 초월해 널리 유통되었으며 궁중 장식화나 당시 진경산수 같은 전통 회화가 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묵향의 기록들은 일러주고 있다. 미술사가인 이태호 명지대 교수는 이와 관련해 “18세기 말 신분 구조의 벽이 붕괴되어 양반층이 급증하면서 상류층의 치레그림(장식화)들이 민간에 보급되면서 원래 도상의 의미를 잃고 민화의 확산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한다. 결국 민화의 매력은 무엇보다 계층을 초월한 선조들의 인간적 욕망이 날것 그대로 녹아 있다는 데서 나온다고 할 수 있는 셈이다. 화려한 십장생·화조도부터 엉성한 산수도나, 혁필 문자도에 이르기까지 걱정없이 부귀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야말로 민화를 감상하는 기본적인 잣대라고 할 수 있다. 광통교 아래 가게에 각색 그림을 걸어놓고 백자도와 한가한 소상팔경 산수도 등을 팔았다는 <한양가>나 안방문, 방벽, 벽장문, 대문, 중문 곳곳에 수복도와 선녀도, 모란병을 붙여 놓았다는 <성조가> 등 조선말 무가의 기록만 봐도 당시 선조들이 오늘날 화랑을 방불케 할 정도로 그림에 심취해 살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뒤늦게 세계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는 민화는 선인들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일상 속 미학을 앞서 추구한 문화인이었음을 입증하는 예술유산이기도 한 셈이다.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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