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9.21 18:50 수정 : 2005.09.22 11:10

‘움직이는 선 드로잉’ 열차가 미국 뉴멕시코주의 황무지를 흰 선을 그리며 달리고 있는 모습이다.

전수천씨 열차 드로잉 동행기


미국 대륙을 가로지른 7박8일 여정은 ‘갈팡질팡’ 고행길이었다. 14일 뉴욕에서 출발한 작가 전수천(58)씨의 ‘움직이는 선 드로잉’ 열차는 갖은 곡절 속에 대륙의 서쪽 끝까지 힘겹게 흰색의 선을 그어나갔다. 드로잉 일부가 된 탑승객들은 연착을 밥먹듯 하는 열차의 ‘심술’과 변덕스런 일정에 녹초가 됐지만, 5450km의 시공간을 이동하는 과정에서 부대끼면서 각양각색의 ‘인간 풍경’을 또다른 작품으로 빚어냈다.

백색의 천 휘두른 열차
물고기 펄덕거리듯 5450km 이동
관객들 소통 화두 못풀었지만
‘즐겁고 기묘한 경험’ 한 입
미 언론-전문가 반응은 미지금

#1. 붓질은 쉽지 않았다

흰색 천 뒤덮인 열차는 워싱턴과 시카고, 세인트루이스, 앨버커키, 그랜드캐년을 거쳐 로스앤젤레스까지 가쁘게 선을 이어갔다. 15량 열차가 하루 동안 달린 거리는 평균 800~900km. 시간대가 세 차례 갈렸고, 차창 밖 풍경도 녹음 짙은 동부 삼림에서 중부 대농원, 서부 초원과 사막 등으로 변했다. 모든 생각과 색깔의 모태라는 흰빛을 머금었던 열차는 먼지 바람에 회색빛으로 변하면서 다기한 풍경을 빨아들였다. 흰 천 펄럭거리는 열차 질주 장면을 찍은 사진가 배병우씨는 “물고기가 비늘을 떨며 펄떡거리는 듯한 느낌”이라고 했다.

기관차를 빌려준 국영 철도회사 암트랙은 ‘지각철도’ 악명에 걸맞게 다른 열차에 길을 터주거나 엔진 점검 등을 이유로 출발을 늦추기 예사였다. 워싱턴-시카고 구간은 예정된 15일 밤이 지난 다음날 아침 도착해 승객들은 열차에서 새우잠을 자야 했다. 미국 언론과 전문가들 반응은 미지근하다. 동행 취재한 미국 기자는 계간 <아트 아시아퍼시픽> 기자 1명이었고, 세인트루이스 등지의 지방지, 방송에 소개기사가 실린 정도였다. 보조기획자 정연심씨는 “참여를 요청한 일부 전문가들은 흑백 갈등을 연상시키는 흰색을 열차 색깔로 삼은 속뜻만 묻더라”며 “인식 차이를 느꼈다”고 했다.

#2. 왜 이 프로젝트를 했지?

왜 한국인이 미국에서 열차 드로잉을 하는가. 15일 미국 비평가들이 초청된 열차 심포지엄에서 나온 의문이었다. 작가 전씨는 무엇이든 포용하는 백색과 어우러진 열차의 시공간 이동을 통해 문명, 자연·인간 사이의 소통을 추구한다는 작업개념을 설명했다. 반면 비평가들은 달리는 열차 안에서 드로잉 전모를 조망할 수 없는 상황을 들어 직접적 평가는 피했다. WJT 미첼 시카고대 교수(미술사)는 “선을 그린다는 건 재미있지만 19세기 미국인들이 부를 찾아 서부로 몰려갔던 대륙횡단을 지금 한국 작가가 시도하려는 까닭이 궁금하다”고 물었다. 그의 물음은 시종 귀밝은 일부 관객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졌다.


#3. 우리 모두가 작품이야!

화가, 가수, 구청 공무원, 제주도 감귤 농부, 부동산 업자, 어학연수생…. 열차에 탄 관객들의 신분과 취향은 각양각색이었다. 초반 서먹해하며 각기 다른 공간을 썼던 사람들은 사나흘 지나자 15량 열차의 곳곳을 스스로 누비면서 대화 공동체를 만들어냈다. 시카고에서의 현대 건축물 기행, 사막의 꽃 산타페의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 견학, 소설가 신경숙, 풍수학자 조용헌, 가수 노영심씨 등의 공연·강연 등이 이들을 가족처럼 묶어주었다. 2층 전망 동차에서는 문화정책과 이동 드로잉의 의미 등에 대한 즉석 토론도 수시로 벌어졌다. 건축가 황두진씨는 “관객들의 자발적 네트워크에서 선을 잇는 열차 드로잉의 본뜻이 제대로 실현된 것 같다”며 “그들 행동 모두가 흥미로운 이벤트”라고 했다.

#4. ‘어쨌든’ 대륙을 가로지르다

뉴멕시코 사막 지평선의 황홀한 일몰과 그랜드캐년의 대자연, 모하비 사막을 통과한 열차는 22일 저녁 태평양이 보이는 종착역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관객들은 열차를 덮은 천 위에 각자 글과 드로잉을 남기면서 프로젝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들은 소통이란 화두를 시원하게 풀지 못했지만, 참여 관객들은 “즐겁고 기묘한 경험”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소설가 신경숙씨는 “곧 사라질 현실 자체까지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미술의 매혹을 실감한 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전씨는 이번 프로젝트의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 영상물과 자료집으로 갈무리해 연말 국내에 전시할 계획이다.

로스앤젤레스/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