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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28 21:46 수정 : 2005.09.28 21:46

‘상평통보’를 갈아 박쥐 모양으로 형태를 만든 가공 별전. 국립민속박물관 도록 <별전> 에서

엽전 한 닢에 조선의 삶과 욕망 응축 ‘애장품’ 으로 사랑받은 돈

투박한 옛 동전의 금속성 표면 위에 숱한 인간들의 욕망이 디자인되어 꿈틀거린다. 오복 중의 으뜸이라는 장수를 비는 십장생 동물도를 비롯해 수복다남, 효제충신 등의 여러 한자 글귀, 용·봉황·박쥐·물고기·사슴·거북이 같은 기기묘묘한 동물들, 당초 등의 온갖 풀꽃이 동전에 새겨졌다. 그뿐이랴. 가장 강렬한 성욕을 상징하는 남녀의 성행위 그림 또한 갖가지 체위로 깔끔하게(?) 묘사되어 있으니 얼굴이 화끈거리면서도 그 매끈한 디자인에 절로 마음이 홀리게 된다.

최근 그 미학적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옛 별전의 만화경 같은 모습들이다. ‘별돈’으로도 불리우는 별전은 아직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인데, 시중에 유통되었던 정상 주화와는 달리 기념주화나 장식용, 패물 등으로 쓰였던 특별한 돈을 일컫는다. 원래 조선 후기 숙종조 이래 널리 유통된 상평통보를 찍어낼 때 재료인 구리의 품질과 무게를 재기 위해 제작된 일종의 시험용 동전, 또는 왕세자 책립을 기념하는 주화의 성격으로 만들어졌으나 이후 궁중과 상류층의 패물이나 장식품으로 애용되었던 유물이다. 일찌기 민화와 궁중공예에 가려 잊혀졌던 이 별전의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했던 이가 일제시대 명성을 날린 연희전문 강사 출신의 민학자 유자후(1895~?)다. 그는 역저 <한국별전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의 별돈이 아니라 별돈의 조선이다… 그 조그마한 별돈 한 닢 속에서 인생을 말하며 예술 문학을 말하며 정치 경제를 말하며 도교 철학을 말하며 무궁 광대를 말하며 무한 영구를 말하며… 기상천외의 감을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조선시대의 온갖 사실과 물상이 녹아있는 모체 관념이 이 별돈의 테두리 속에 살아 있었다… 나는 별돈에 대해 흠모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유자후가 별전을 이토록 경탄하며 연모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별전이 모든 사람들이 갖기를 원하는 돈에 계층을 초월한 세속적 바램과 욕망, 당대의 사상과 철학을 지극히 세련된 예술적 양식으로 녹여넣은 당대 풍속·생활사를 비추는 거울이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별전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으나, 문양의 정교함이나 조형적 성취, 메시지의 다양성 측면에서 우리 별전이 단연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다.

별전의 시초는 삼국시대 불가에서 망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의식적 용구로 쓰였던 종이돈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삼국유사>에서 당대의 고승이자 문인이던 월명사의 행적을 서술한 ‘월명사 도솔가’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월명사는 죽은 누이 동생을 위해 재를 올리면서 향가를 지어 제사를 지내는데, 문득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더니 종이돈(지전)을 날려서 서쪽으로 사라지게 하였다….”

저 유명한 향가 <위제망매가>의 지은이 월명사의 이야기처럼 당대 지전은 죽은 자를 추모하는 용도였다. 고려 때 기록인 <포은집>과 조선시대 왕실기록 등에서도 지전을 제사 때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동전을 공예화한 별전이 본격 제작된 것은 숙종 이후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부터다. 별전은 민화 등 다른 민간 공예품과 달리 상류층의 애장품으로 사랑 받았다. 허난설헌이 반달 모양의 별전을 노래한 한시를 지었고, 금석학의 대가 추사 김정희가 갈천고폐전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별전을 항상 쌈지 속에 넣고 다녔다는 고사 등은 유명하다. 구한말까지 신부들은 시집갈 때 명월패라 하여 열쇠 꾸러미 별전을 달아 혼수와 함께 들고가기도 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최근 주요 박물관의 소장품 별전 286점을 모아 정리한 도록 <별전>을 보면 당대 조선사람들의 디자인 감각이 물이 오를 대로 올라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꼬리를 모은 잉어와 박쥐, 나비, 뭉친 꽃 모양으로 틀을 두른 외형은 물론, 동전 안에 오늘날 공공 표지판의 기하학적 픽토그램 이미지 같이 단순화한 성교 체위 이미지들은 세련된 디자인 감각이 경탄스럽다. 전서, 예서체의 글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뒤바꾸어 집어넣은 글자 디자인은 외국 별전에서는 볼 수없는 신비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상평통보를 갈아 톱니나 동물모양으로 만든 여러 별전의 그악한 자태에서 삼강오륜의 질서가 강요된 조선시대에도 지금 못지않게 절절한 세속적 욕망이 소용돌이쳤음을 실감하게 된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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