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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5 17:03 수정 : 2005.10.06 14:29

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

‘너’ 의 존재를 인정해주마

가수의 실명이나 노래 제목은 밝히지 않겠다. 그 음반을 고른 건 ‘기사(driver)도’ 정신 때문이었다. 오랜 친구들과의 짧은 가을여행, 운전기사 역할을 맡기로 하면서 주행 중 들을 만한 음악에 대해 한참 고민하다 내린 결정이었다. 1980~90년대 히트송들을 새롭게 불렀다는 젊은 가수의 시디를 카 오디오에 넣고 자랑스레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들 좋아하리라 믿었던 나의 예상은, 무참히 빗나갔다. 시디의 1번 트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뒷자리에서 심한 야유가 터져 나왔던 것이다. “이거 대체 누가 부르는 거야? 남의 노래를 이렇게 망쳐놔도 되는 거야?”같은 투덜거림에서, “세상에, 이 음반 돈 주고 샀어? 돈이 남아 도냐?”등의 (애먼 나를 향한) 비난에 이르기까지 친구들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남의 정성을 무시하는 나쁜 것들! 이 음악이 어디가 어때서…” 의연하게 대꾸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내 귀에도 무언가 좀 이상했기 때문이다. 젊은 가수가 새로 부르는 옛 노래는, 내가 아는 그 노래가 틀림없건만 한편으론 내가 아는 그 노래가 아닌 듯도 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편안하고 담담하게 이별을 노래하는 보컬이 원곡의 특징이었다면, 리메이크 곡은 너무 진하고 너무 절절했다. 원곡이 담백하고 맑은 평양식 물냉면이었다면, 리메이크 곡은 끈끈하게 녹인 치즈에 마요네즈 소스, 머스터드 소스 따위를 계통 없이 잔뜩 쏟아 부어 만든 정체불명의 이국요리에 가까웠다. 느끼한 음식을 먹은 뒤에 종종 그렇듯 여행 내내 나는 어서 빨리 원곡을 들으며 개운하게 속풀이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에 시달려야 했다.

집에 와, 어디 처박아 두었는지도 잊었던 원곡 시디를 기어이 찾아냈다. 심심하리만치 덤덤한 음악이 흐르자 금세 마음이 가라앉고 머릿속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리메이크 곡을 듣는 동안 내가 불편했던 이유가, 가슴 깊은 곳의 아주 작고 부드럽고 내밀한 어떤 것이 만천하에 까발려지고 훼손당하는 느낌 탓이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지나온 청춘의 한 부분, 이제는 고요히 서랍 속에 들어있는 그 추억이 예기치 못하게 끄집어져 울긋불긋 분칠한 채 저잣거리 한복판에 진열된 것을 바라보아야하는 심정이 혹시 이럴까?

요즘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80~90년대의 노래들이 다시 불리고 있다. 그만큼 우리 대중음악 역사가 풍요로워졌으며 다양성과 깊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겠다. 이 불황의 시대에 30~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동시에 10~20대에게는 참신하게 다가가는 이중전략을 구사하는 업계관계자들도 이해할 만하다. 그렇지만 유행가의 핵심은 당대성과 시대정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 당시 이 노래가 왜 대중의 사랑을 받았었는지, 대중은 왜 이 노래를 사랑했었는지 등의 의문은 휘발시켜 버리고 무작정 장식적으로 편곡하여 ‘부활’ 이랍시고 들이대는 모습엔 아무래도 정이 가지 않는다.

해결 방도는 하나 뿐인 듯하다. 촌스러운 내 태도를 바꾸는 것. 2005년 애절하고 느끼하게 귓가에서 미끄러지는 저 노래를, 1995년 맑고 담담하고 치명적으로 내 폐부를 찌르던 그 노래와 전혀 다른 곡이라고 생각해야겠다. 그리고 2005년의 노래는, 1995년의 것이 그랬듯, ‘지금·이곳’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반영한다고 믿어야겠다.

2015년 즈음의 어느 날 문득 친구들과 함께 떠났던 십 년 전 가을여행을 추억하는 순간이 찾아올까? 그때 추억의 백 뮤직으로 깔릴 노래는, 우리가 그렇게 구박하던 2005년 버전의 리메이크 곡일지도 모르겠다. 간절히 그리운 것은 어쩌면 음악이 아니라 시간일 테니까. 시간의 경계를 일시에 허물어 트려주는 작은 실마리. 그 역할이야말로 유행가의 존재이유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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