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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05 19:56 수정 : 2005.10.06 14:22

자장면 먹을때 그릇에 왜 물이 고일까?


100년 동안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아온 자장면. 주머니가 찼거나 비었거나 달콤하고 쫄깃한 맛으로 주린 배를 위로해준 살가운 친구다. 한국에서 하루 평균 70O만 그릇이 팔려나가며 질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자장면에 대해 궁금했던 점 몇 가지를 정리했다.

종류별 차이점은?

개발하기 나름이라 베테랑 주방장도 모조리 꿸 수는 없지만, 일반 중국집에서 파는 자장면은 7~8가지로 추려낼 수 있다. 간자장은 물과 전분을 넣지 않은 마른 자장면이다. 담백하고 춘장 고유의 맛을 살린 것이다. 보통자장은 물과 전분이 들어간다. 양파는 필수지만 그밖에 재료야 요리사 맘이다. 예전에는 무말랭이를 물에 불린 뒤 넣기도 했다. 삼선자장은 세 가지 해물을 보탠 것이다. 새우, 해삼, 오징어다. 오징어 자리를 가리비가 대신하기도 한다. 유니자장은 양파와 고기만 잘게 다져서 넣어 부드럽다. 이보다 좀 고급스러운 축에 속하는 게 매운 사천자장이다. 춘장이 아니라 콩을 붉은 고추와 함께 발효시킨 ‘두반장’으로 맛을 내기 때문에 붉은 색이다. 표고버섯, 가리비, 죽순 등이 들어간다. 이밖에 양파와 쇠고기를 채 썰어 넣는 유슬자장, 고기 대신 감자나 고구마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옛날 자장, 간이 스미도록 면을 소스에 함께 볶아 여러 사람이 나눠먹게 나오는 쟁반자장 등이 있다.

중국엔 자장면이 없나?

자장면 먹을때 그릇에 왜 물이 고일까?
한국 자장면은 조선족이 하는 식당 아니면 찾기 어렵지만 자장면의 조상 뻘 되는 음식은 있다. ‘자장미엔’이라고 산둥과 북경 농촌에서 여름에 먹던 간편식이다. ‘미엔장’ 등으로 불리는 중국식 된장을 볶아 국수에 올린 것이데 돼지고기나, 고수풀을 고명으로 얹기도 한다. 한국 자장면보다 짜다. 50대 이상 중국인은 알지만 도시 젊은이들에겐 서서히 잊혀진 음식이 됐다. 춘장은 ‘미엔장’이 한국식으로 변형된 것으로 원래는 상표 이름이었다.

왜 짜장이 아니라 자장면?

자장면은 외래어 표기법에 따른 것이다. 중국어 ‘자장미엔’의 첫발음이 제트(z)에 가깝기 때문이다. 왜 짬뽕은 잠봉이 아닌가? 짬뽕은 일본어에서 온 말로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잠퐁’으로 써야 한다. 하지만 짬뽕은 자장면보다 우리말에 동화돼 굳어졌고, ‘여러 가지를 섞는다’는 뜻으로 의미가 넓혀졌기 때문에 표준어로 인정한다.


좀 더 맛있게 먹는 법

자장면은 만들어지고 3분 지나면 불기 시작한다. 배달시켜 먹으면 맛은 손해를 보는 셈이다. 식초를 몇 방울 떨어뜨리면 국수가 매끄럽고 윤기가 돈다. 자장면의 밑반찬은 달콤한 단무지이지만 통마늘과 함께 먹어도 알싸하게 맛있다.

자장면 1인분의 칼로리는 670㎉로 짬뽕(404)나 라면(455)보다 높은 편이다. 성인 남자는 2시간6분, 성인 여성은 2시간20분 정도 빨리 걸어야 다 쓸 수 있는 칼로리다. 자장면을 먹을 때 그릇에 물이 많이 고이기도 하는데 이는 침 속에 있는 소화효소 아밀라아제가 전분을 분해하며 생기는 것이다.

도움말 이휘량 밀레니엄 힐튼호텔 중식당 ‘타이판’ 주방장. 책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중여하 지음·책세상 펴냄) <중국의 하늘을 연다>(하성봉 지음·일송북 펴냄), <쉽게 찾는 칼로리북>(한영실 지음·현암사 펴냄).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그래도 짜장면 이다

‘짜’ 자가 주는 냄새의 공습에
속수무책 무너져 봤거늘
맛없고 낯선 자장면이라니
짜장면이여, 영원하라

그래도 짜장면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짜장면>을 출간하고 나서였다. 어느 방송국에서 인터뷰를 할 때였는데, 젊은 여성 아나운서는 표지에 큼지막하게 쓰인 ‘짜장면’을 놔두고 자꾸 ‘자장면’이라고 발음을 하는 것이었다. 맛있고 낯익은 ‘짜장면’을 두고 맛없고 낯선 ‘자장면’으로 소리를 내야 그는 직성이 풀렸나 보다. 직업의식이 남달라서 그렇겠거니 하고 이해할 수도 있었지만 바로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억울하고 답답했다. 그날 나는 일부러 ‘짜’를 강하게 발음하는 강짜를 부렸다. 그때마다 그 아나운서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분명히 보았다.

국어의 표기 문제에 시비를 걸자는 게 아니다. ‘짜’라는 된소리로 인해 우리의 기억 속에 배어 있는 그 냄새가 훨씬 그윽하게, 더욱 적극적으로 코를 자극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짜장면의 마력은 뭐니뭐니해도 그 냄새가 퍼뜨리는 힘으로부터 나온다. 그 냄새에 슬쩍 감염되면 지위고 체통이고 다 내려놓을 준비를 해야 한다. 가족도 국가도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그 냄새 앞에서는 백기를 들고 투항할 수밖에 없다. 시각 이미지를 신처럼 떠받들어 모시던 근대인도 그 냄새를 맡았다 하면 아예 눈을 감고 코만 킁킁거리게 된다. 가장 미련한 감각으로 치부되던 후각이 일시에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평정하는 것이다. 귀부인의 값비싼 향수도 그 어떤 고약한 냄새도 짜장면 냄새를 제압하지는 못한다.

점심시간이 되어 누군가 자장면이나 한 그릇 먹자고 하면? 그러면 당신은 선뜻 따라나설 건가? 나는 별로 내키지 않을 것 같다. 짜장면을 먹자고 해야지 자장면을 먹자고 하면 영 입맛이 당기지 않을 게 뻔하다. 맞춤법에 따라 벽에다 착하게 ‘자장면’이라고 써놓은 중국집을 가도 기분이 개운치 않다. ‘짜장면’이란 어감이 주는 냄새의 공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배가 고플 때, 우리 스스로 짜장면 냄새를 찾아가는 것은 아니다. 짜장면 냄새가 우리의 허기를 용케 먼저 알아챈다. 우리는 그저 허기를 들킬 뿐이다. 냄새는 우리를 끌어당겨 속을 뒤집으며 입안에 침을 고이게 만든다. 짜장면 냄새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이다. 그런데도 자장면이라니!

안도현 시인
그 냄새의 유혹이 없었다면 받아쓰기 만점을 위해 연필 끝에 침을 발라 또박또박 글씨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면발이 콧등을 치는 줄도 모르고, 볼이며 턱밑에 검은 얼룩이 점점이 생기는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젓가락질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면발을 빨아들일 때 후루룩거리는 소리가 남의 귀에 들리든 말든 우리는 짜장면 때문에 온순해지고 이만큼 키가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개중에는 가출해서 짜장면 배달원으로 위장 취업한 ‘고삐리’들도 종종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짜장면이 황해를 건너와 이 땅에 귀화한 지 백년이라던가. 고맙다, 짜장면아.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시골 면소재지에도 기어이 간판을 내리지 않고 있는 중국집들아. 달랑 한 그릇을 주문해도 싫다는 내색 없이 달려오는 오토바이들아, 고맙다. 부디 영원하거라.

안도현/시인

자장면 맛집 소문 반세기 한자리 지켜

을지로 ‘오구반점’ 왕수발 사장

자장면 맛집 소문 반세기 한자리 지켜
서울 을지로3가 오구반점은 음식칼럼니스트 김순경씨가 추천하는 최고의 자장면 맛집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막 끝난 뒤 문을 열어 52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5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길 안동장이 요리가 유명한 반면, 오구반점은 자장면과 집에서 직접 만든 군만두가 주종목이다. 오구반점 왕수발(68·사진) 사장과 안동장 왕용성(52) 사장은 먼 친척뻘이다.

하얀 중국식 옷을 입은 왕수발 사장은 “60년대만 해도 자장면 값이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고 기억한다. 서민들은 쉽사리 먹기 어려운 음식이었던 셈이다.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 야채와 고기를 버무려 볶은 자장면은 한끼 식사로 넉넉했다.

호시절이 끝난 것은 70년대 이후. 유신정권은 화교자본을 억제하려고 세금을 무기로 사용했다. “어휴 말도 말아요. 1년에 4번이나 세금이 올라가는데 견딜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여섯달 동안 문을 닫고 장사를 안했지. 나중엔 새로 부임한 세무서 담당 직원이 사정사정 하더라고. 제발 장사 좀 하라고 말이야.”

견디지 못한 화교들은 미국으로 대만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되놈’이니 ‘짱께’니 하고 멸시도 많이 받았다. “세계에서 차이나타운이 없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는 말은 자명한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요. 다른 나라 가봐야 말이 통하나, 집이 있나, 친구가 있나. 아무 것도 없잖아요.”

중국 산둥성 옌타이가 고향인 왕 사장은 11살 때인 1948년 아버지를 따라 한국으로 왔다. 한양대 토목과를 졸업했지만, 중국인이기 때문에 취직을 할 수 없었다. 중국인 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던 그는 1967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업을 이었다. 절대 떠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가게 이름을 ‘교통반점’에서 ‘오구반점’으로 바꿨다. 가게 번지수(5-9)를 땄다. 같은 해 태어난 큰 아들의 이름도 ‘오구’다. 2000년대 들어 외식 프랜차이즈가 번창하면서 손님이 줄자 종업원을 쓰지 않고 ‘가족 경영 체제’를 굳혔다. 왕씨의 어머니(95)를 포함해 4대가 가게 건물 3층에서 함께 산다.

“이 근처 신탁은행 청계지점에 나하고 나이가 같은 대리가 있었지. 그런데 한 몇 년 안보이더니 차장이 돼서 왔더라고. 그러더니 또 몇 년 안보이더니 지점장이 돼서 왔지 뭐야. 참 반갑더구만. 그 사람 요즘도 와요.”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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