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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불교 조각실에 전시된 감산사 미륵보살 입상(왼쪽)과 아미타불 입상. 몸체 뿐 아니라 화염 광배와 대좌의 섬세한 세부 조각이 일품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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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능미 물씬 풍기는 아미타상·미륵상 1200년전 선남선녀 모습일까
“…터질 듯이 팽팽한 살집에서 육감적 관능미를 느낄 수 있는데, 가슴을 가로지르는 천의(天衣)도 오른쪽 겨드랑이 사이로 빠져나와 왼쪽 어깨로 넘어가며 비사실적인 기이한 곡선을 그리고 있어 자못 고혹적이다…오른손을 늘어뜨려 천의 자락을 살짝 쥐고 있으며 왼손은 젖가슴 근처까지 들어올려 손짓해 부르는 형상을 짓는다. 정녕 뇌쇄(여자가 아름다움으로 남자를 애태움)성이 짙은 표현기법 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상조각의 권위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이 몇 해 전 한 월간지에 쓴 이 글은 우리 전통 미술사에서 가장 ‘섹시한’ 조각상으로 첫 손꼽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 입상을 뜯어본 감상기다. 경주 토함산 남쪽 기슭의 감산사터 논밭에 팽개쳐져 있다가 90년 전 일본인들이 아미타여래상과 함께 캐어낸 이 토실한 미륵상은 관음증을 발동시키는 풍만한 여성의 몸매와 야릇한 가슴 장식, 허리와 다리를 휘감으며 하늘거리는 치마끈과 옷자락 등이 압권이다. 지금껏 숱한 미술사학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이 미륵상에 더해 아미타여래 입상은 주름 가득한 옷 속에 강건한 남성의 육체 윤곽을 도두어 놓아 또 다른 관능미를 풍긴다. 연인처럼 나란히 놓인 두 입상을 찬찬히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얼굴이나 몸매 등에서 통일신라 시대 경주의 혈기방장한 선남 선녀 귀족들이 불상의 모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의 나래로 빠져들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우리 불교조각의 최전성기였던 8세기에 나온 이 두 구의 불상이 저 유명한 석굴암에 버금가는 가치를 지닌 세계적 조각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김리나 홍대 교수는 “감산사 입상이 없다면 우리가 예찬하는 8세기 통일신라 조각사는 큰 구멍이 뚫려버릴 것이며 후대 석굴암도 가치가 무색해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일반인들보다도 전문가들이 더욱 흥분하고 상찬하는 감산사터 입상의 가치는 불상 광배 뒤에 발원 및 조성 시기를 정확하게 새긴 장문의 한자 명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대문장가 설총이 썼다는, 역사적 상상력의 여지가 가득한 명문 덕분에 감산사터 입상은 절대 연대가 확인된 기준 유물이자 통일 신라의 역사적 정보가 풍성하게 담긴 ‘타임캡슐’이 되었다. 미륵보살 입상 뒤에 새겨진 명문에는 개원(開元) 7년인 719년 2월15일에 신라의 고위 관료인 중아찬 자리의 김지성(652∼720년)이 세상을 뜬 아버지 인장과 어머니 관초리를 추모하려고 별장에 절을 짓고 돌 아미타상과 돌 미륵상을 만들어 바친다는 내용을 새긴 뒤 이렇게 이어 적었다. “…지성은 좋은 세상에 나서 영광스런 지위를 지냈는데, 지략이 없는데도 조정에서 시속을 바로 잡으려다 겨우 형벌을 모면했다. 성품이 산수를 좋아하여 장자와 노자처럼 자연 거니는 것을 좋아하고, 진종(眞宗:불교)을 중히 여겨 무착(無着: 4세기께 간다라에서 대승경전 ‘유가사지론’을 편찬한 고승)의 심오한 깨달음 얻기를 빌었다. 67세에 한가한 시골 밭으로 돌아와 5천언의 ‘노자 도덕경’을 펼쳐 읽으니 명예와 지위를 버리고 현도(玄道:심오한 도)에 들어온 듯하고 17지(地)의 법문(‘유가사지론’)을 연구하니 색(色; 현상)과 공(空; 근본)이 무너져서 함께 사라져버린다…” (해석 최완수) 난해하면서도 그윽한 이 명문 내용은 발원자 김지성의 사상적 배경을 둘러싸고 일제시대부터 학계의 논쟁을 불렀지만, 우리 선조들이 통일신라 때 이미 불교와 도교 등의 외래 사상을 심오한 경지에서 사고했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김지성의 명문은 아우인 양성과 현도, 누나인 고파리, 누이동생 수혜매리, 후처인 아호리, 배다른 형인 급한, 총경 등 가족들 실명도 축원대상으로 언급해 당대 가족 관계를 규명할 단서도 내어주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들 두 불상이 뚜렷한 서역 실크로드 조형 양식을 띠었다는 점이다. 미륵보살 입상은 오른쪽 겨드랑이에서 가슴을 가로지르는 휘장 장식이 왼쪽 어깨에 교묘한 매듭을 짓고 있는 데, 이런 섹시한 옷 장식은 서역 쿠차의 키질 석굴 벽화 등에서 볼 수 있다. 또 유(U)자형 옷 주름이 가슴과 배를 지나 두 다리 사이에서 두 가닥으로 섬세하게 갈라지도록 표현한 것도 새 양식으로 인도 굽타시대 마투라 불상에서 비롯해 서역 불상으로 이어져가며 발전했던 특징이다. 당나라 문물이 물밀듯 들어왔던 성덕왕 때 조성되었고 발원자 김지성 또한 당나라 사신을 지낸 사실을 미뤄보면 첨단 실크로드 문화가 경주에 남긴 산물이 이들 불상인 셈이다. 지금 감산사의 두 입상은 오는 28일 개관할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동 동쪽 끝에 사이좋게 서있다. 고즈넉한 저녁 삼면 창에 비치는 남산 풍광을 등진 남녀불은 사연을 숨긴 채 웅숭깊은 눈빛으로 후대인을 마냥 지켜볼 뿐이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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