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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에서 본 녹우당 전경. 오백년 됐다는 은행나무가 앞에 수호신 마냥 서 있는데, 고산과 공재, 다산도 이 나무를 지켜보았을 것이다. 작은 도판은 공재의 친구 이서가 쓴 녹우당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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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도·윤두서 자취 밴 해남 윤시 종가 ‘푸른 빗소리’ 에 인생무상이
‘세상이 버리거든 나도 세상을 버린 뒤에/강호의 임자 되어 일없이 누웠으니/어즈버 부귀공명이 꿈인 듯 하여라’ 우리 국문학의 비조로 꼽히는 고산 윤선도(1587~1671)의 손자 윤이후(1636~1699)가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 지은 이 시조는 해남 윤씨 가문의 종갓집인 전남 해남 녹우당의 고적한 분위기를 빼어 닮았다. 그는 분명 바람소리 은은한 녹우당의 뜰이나 숲, 근처 별채를 거닐며 은거하는 자의 기쁨과 울적함을 노래했으리라. 녹우당은 해남의 고찰 대둔사 가는 길목인 연동면 덕음산 자락에 있다. 남동쪽으로 솟을 대문을 내고 일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가 합해져 ㅁ자형의 특이한 형태를 이룬 이 옛집은 해남 윤씨 가문의 걸출인 예인 윤선도와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1668~1715)의 체취가 올올이 녹아있는 건축물이다. 진산인 덕음산 자락에서 넓은 해남들녘을 바라보며 박학다식을 특징으로 한 이들의 예술정신이 영글었고, 공재 윤두서는 저 유명한 <자화상>과 숱한 풍속, 산수화들을 바로 이 곳에서 창작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파로는 비주류 남인계열이었던 이들에게 평생을 따라다닌 것은 당쟁의 먹구름이었다. 그들의 무대였던 녹우당또한 건물 뒤 비자나무 숲의 울림이 푸른 빗소리 같아 지었다는 건물 이름과 다르게 비극적 정서를 깔고 있다. 서인 실력자 송시열의 전횡을 비판했다가 평생 귀양으로 세월을 보낸 고산이나 형제가 당쟁에 연루되어 벼슬길을 포기하고 평생 친척과 친구들의 상을 보내는 것으로 일생을 보낸 공재는 다 이곳으로 낙향해 인생무상을 실감하며 학문에만 정진했던 것이다. 중국과 조선의 최신 학술서적과 그림, 글씨에 열중했던 공재가 이곳에서 향리에 은거하는 감회를 표현한 듯한 시조가 한 수 전하고 있다. ‘옥에 흙이 묻어 길가에 바려시니/오는 이 가는 이 흙이라 하는고야/두어라 알이 있을지니 흙인 듯이 있거라’ 녹우당이라는 이름은 공재 윤두서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동국진체 글씨를 창안한 옥동 이서가 윤두서의 청아한 선비적 풍모를 건물 뒤 숲의 청아한 소리에 비유해 지은 것이다. 건물은 고산 윤선도가 스승이었던 효종이 하사한 수원 집의 일부를 고산이 해남으로 돌아올 때 뜯어 지은 사랑채와 성종 3년인 1472년 지어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이 건물은 왕궁에서나 쓰는 차양을 두른 처마나 지붕 내림마루에 툭 솟은 부엌 공간의 환기구, 이중으로 된 안채 처마 등 기존 전통 양반 가옥과는 다른 품격과 실용적 외관을 간직하고 있다. 묵향의 기록들은 이 고즈넉한 종갓집을 진경산수화와 문인화, 풍속화의 기틀을 놓은 공재 윤두서의 창작 무대이자 조선 후기 문예사의 주요한 배경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아들 낙서 윤덕희가 부친의 일대기를 기록한 <공재공행장> 등을 보면 공재는 고산이 이룩한 박학의 전통을 이어 중국 등지의 천문 지리서와 의서들을 독파하고 칠현금 등의 악기를 만들고 연주했으며 패관소설 등도 읽어 세상 이치에 두루 통달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평소 나이 어리고 천한 종에게도 반드시 이름을 지어 붙이고 심지어 노비문서까지 태워버린 그의 진보적 행적들은 이처럼 종가인 녹우당에서 고서와 새책들을 섭렵하며 닦은 실학 정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물치지의 정신으로 자기의 심성 밖 사물의 원리와 이치를 찾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던 그의 실천적 면모는 현재 이곳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동양 초상화의 최고 걸작인 <자화상>과 풍속화의 선구가 되는 <해남윤씨가전화첩>의 그림들로 나타난다. 보는 이를 강렬하고 박진감 넘치는 눈빛으로 얼어붙게 만드는 자화상은 눈가에 짙게 어린 우수어린 흔적이 압권이다. 녹우당에서 은거하면서도 숱한 지인과 친지들의 죽음 앞에 절망해야 했던 그의 중년기 표정이 그대로 살아나있다. <목기깎기>, <짚신삼기>, <나물캐는 여인> 등의 풍속화에서는 당시 해남 종가에 기거하며 접한 하층민들의 삶의 애환에 대한 깊은 관심이 엿보인다. 특히 진경산수화의 서막이라고 할 수 있는 <산골의 봄>의 구도는 영낙없이 녹우당 앞 산 자락의 들녘에서 평민들이 밭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화첩은 훗날 남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녹우당에서 철저히 뜯어보며 화력을 닦은 인연으로 이어진다. 공재의 화첩과 유물전시관에 소장된 고산, 공재, 그리고 그들의 박학정신을 이은 외손인 다산 정약용의 손때묻은 수천점의 고문서와 서책들은 어김없이 선대 문인들의 작품과 문헌을 갈무리했던 후손들의 정성과 공력으로 지금껏 보관될 수 있었다고 한다. 윤씨가문의 14대 종손 윤형식씨는 녹우당 현판이 걸린 안채 마루에서 차를 권하면서 “선조들의 예술과 학문을 후손들이 반드시 잇고 갈무리 하는 계학 정신이 문예가문의 기반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글·사진 해남/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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