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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2 18:52 수정 : 2005.11.03 14:40

정이현 소설가

저공비행

시트콤에도 궁합이 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시트콤의 지존 김병욱 프로듀서의 이름이 걸린 작품이라면 두 번 생각할 나위도 없이 무조건 올인이다. 누군가 내 인생 최고의 방송작품에 대해 묻는다면, <순풍산부인과>를 꼽아야 할지 <똑바로 살아라>를 꼽아야 할지 꼬박 일주일은 갈등해야 할 정도다. 한참 물이 오르는 상황에서 어처구니없이 종영을 맞은 비운의 명작 <귀엽거나 미치거나>를 생각하면 아직도 혈압이 수직상승한다. 한때는 다른 방송국의 높은 분께 “제가 끝내주는 제안 하나 할게요. 미니시리즈 아니면 주말드라마 연출에 김병욱 피디를 기용해 보는 건 어떠세요? 순풍, 웬만해선, 똑살, 귀미의 인물들이 전부 다 나오는 거죠” 라는 편지를 써볼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줄거리도 짜 놨다. 산부인과 오지명 원장님과 중견배우 노주현 아저씨가 사실은 오랜 친구 사이였으며, 오원장님의 막내딸 혜교와 이창훈 커플이, 노주현 아저씨의 큰딸 정윤, 정명 커플과 사각관계로 얽혀 들어가는 거다. 정윤의 엉뚱하고 눈치 없는 여동생 노민정 양이, 김수미 여사의 갤러리에서 일한다면 소유진, 박경림과 어우러져 포복절도할 일들이 또 얼마나 많이 일어날까. 아, 이보다 더 멋진 프로젝트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며 쩝쩝 입맛만 다셔본다.

김병욱 표 시트콤의 힘은, 누가 뭐래도 캐릭터의 힘에서 나온다. 우스꽝스럽고 희화화되거나, 과장된 캐릭터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 도시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인 인물. 그러나 현실의 우리 모두가 그렇듯 ‘아주 조금’ 신경질적이거나 수줍거나 치사하거나 실속 없이 정의로운 인간이 그 속에 살고 있다. 그러다가 뒤통수를 맞기도 하고, 치졸한 속내를 들켜서 ‘쪽팔려’ 지기도 하며, 전혀 예상치 못한 인생의 굴곡을 맞이하기도 하는, 구질구질하고 사랑스러운 인간들.

며칠 전, 이렇게 ‘번듯하지 못한’ 인물로 가득한 시트콤 하나가 또 우리 곁을 떠났다. 제목도 촌스럽다. <올드미스 다이어리>. 시작하기 전에는, 이 무슨 구시대적 작명이냐며 기막혀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시트콤, 보면 볼수록 보석이었다. 김병욱 식 시트콤의 기저에 깔린 것이 냉소적 느낌이었다면, 올미다에는 ‘따뜻한 쿨함’ 이라는 정서가 흐른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할머니들은 생기 없는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순간순간 생에 대한 열의와 희망으로 반짝이는 분들이었고, 살림을 도맡아하는 우현삼촌은 어떤 드라마에서도 보지 못한 인간미를 지닌 멋진 남자였다. 혈연이 아니면서도 피로 묶인 사이보다 더 살갑게 마음을 나누며 더불어 사는 이들의 관계를 보면서, ‘진짜 가족’ 이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빠, 올드미스다이어리 있잖아요. 그게 그렇게 재밌으세요?” “그럼. 최고지.” 일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대답하시는 분. 바로 우리 아버지다. 미자, 지피디, 윤아, 정민, 최부록 등등 등장인물의 이름을 마치 막역한 친구라도 된다는 듯 너무나 친근하게 부르시는 울 아빠. 올미다를 통해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짐작했던 젊은 세대의 숨겨진 진심 한 자락을 비로소 엿보게 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이집 딸로 태어난 지 어언 삼십 몇 해. 내 기억이 맞는 한, 우리집에 텔레비전이라는 물건이 생기고 나서 아버지가 방송 프로그램에, 그것도 극(劇)에, 이렇게까지 몰입하시는 모습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드라마를 보며 눈물콧물 빼곤 하는 엄마와 나를, 희한해하는 눈길로 바라보던 아버지의 ‘올미다’ 교(敎)로의 개종은 확실히 놀라웠다.

매일 밤 울고 웃기던 그 올미다가 끝나버렸으니 앞으로는 우리 아버지, 아홉시 이십오 분에 대체 무얼 하시나? 나, 평소 효녀와는 거리가 먼 인간이지만, 올미다 없이 주무실 아버지를 생각하면 맘이 짠해진다. 그래서 제안한다, 또 하나의 매력 프로젝트. <올드미스다이어리> 시즌2!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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