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02 21:16
수정 : 2005.11.04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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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의 전경(왼쪽)과 옆면 모습. 위쪽 언덕 위에 보조선사의 부도탑인 창성탑이 보인다. 둘 다 신라 하대 불교조각 장르를 대표하는 중요한 기준 유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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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 전파 주역 ‘체징’ 추념비 부도탑과 탑비 사이 안개못
1000여년전 사상투쟁 보는듯
자욱한 안개비 속에 젖어든 가을 산사의 들머리 구석에 푸르딩딩한 탑비가 우뚝하다. 뱀 같이 용머리를 치켜들고 발톱으로 땅을 짓누른 성난 거북의 등 위에 2m가 족히 넘는 비석이 지붕돌(이수)을 인 채 답사객의 눈길을 맞았다. 이끼에 덮히고 비바람에 깎인 비 표면에는 멋들어진 해서체와 행서체의 한자 금석문이 일필휘지로 가득 새겨졌다.
한껏 유려하면서도 권위감을 겸비한 글씨는 지붕돌인 이수에 3행의 제목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름하여 ‘가지산보조선사비명’. 가지산은 바로 인도와 중국의 성산 가지산을 뺀듯이 닮았다는 전남 장흥군의 가지산이다. 절은 9세기 이 땅에 최초로 선종의 법맥을 일군 가지산 선문의 본산지 보림사이며 보조선사는 곧 이 해동선문을 연 개조인 체징(804~880)이다. 바로 복잡한 교리를 초월한 초논리로 단번에 깨달음에 이른다는 선종 사상을 이땅에 흩뿌린 선종 전파의 주역 체징의 추념비다. 해동 선문의 본산이던 보림사의 보조국사 창성탑비(보물 157)의 자태는 혁명 불교를 표방하며 나말 여초의 사회변혁기를 선도한 정신적 실력자가 된 체징의 카리스마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당대의 문장가 김영이 짓고 걸출한 서예가 김원과 김언경이 나누어 썼으며, 경주 흥륜사의 장인 승려 석현창이 새겼다고 기록된 비석의 첫 머리는 선종의 경지를 풀이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된다.
‘듣건대 무릇 선(禪)의 경지는 그윽하고 고요하며 올바른 깨달음은 심오하여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워 허공과 같고 바다와 같다 …공(空)을 깨달은 사람은 단숨에 저 사악한 산을 뛰어 넘으나 세상 일에 매어있는 자는 영겁이 지나더라도 악업에 가로 막혀 있다.’
884년 세워진 이 탑비는 국내 금석학은 물론 불교조각사와 신라 하대사 연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유물이다. 조성연대와 경위가 모두 명확히 드러나있을 뿐 아니라 비석의 귀부가 거북이 모양에서 용두로 바뀌어가는 신라 하대 탑비의 전형성을 보여준다. 주목되는 것은 글씨인데, 본문 7행까지는 김원이 당나라풍 해서로 쓰고 이후부터 제자 김언경이 왕희지풍의 유려하고 감각적인 글씨를 썼다. 두 서예가가 다른 서체로 비문을 쓴 것은 매우 드문 일인데, 김원이 글씨를 쓰다 숨져 제자가 잇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이다. 또 웅장한 빗돌에 비해 귀부와 이수는 점차 작아져 실리를 중시하는 선종의 영향을 비의 모양새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체징은 이땅 선종의 개조인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으로부터 선법을 전수받고 당나라에 유학갔다와 선종을 본격적으로 전파한 장본인이다. 탑비의 내용 가운데는 그가 선종의 실질적인 개창조가 된 정치적 배경에 얽힌 사적들이 보인다. “개성 5년(840년) 봄 2월 (중국에서)고국에 돌아와 고향을 교화하였다… 대왕은 소문을 듣고 꿈에서도 애를 쓰고 선문을 열고자 하여 서울로 들어오기를 청하였다. 여름 6월 왕명으로 장사현 부수 김언경을 파견하여 차와 약을 보내고 맞이하게 하였다. 겨울 10월 영암군 승정(僧正) 연훈법사와 봉신(奉宸) 풍선 등을 보내 가지산사(보림사)로 옮기기를 청하였다. 산문에 옮겨 들어가니 곧 원표대덕이 옛날 거처하던 곳이었다… 당(唐) 선제(宣帝) 14년 2월 부수 김언경은 제자의 예를 갖추고 사재를 내어 철 2,500근(斤)을 사서 로사나불상 1구를 주조하여 장엄하였다.’
경주에서 한참 떨어진 오지의 절과 승려를 왜 왕실에서 애지중지했을까. 장흥을 비롯한 남도 일대는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 본거지와 가까운 우호세력들의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승들 또한 장보고 선단을 타고 당나라를 오갔기 때문에 해상군단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왕위 쟁탈전에 관여했다가 841년 남도인 염장에게 암살되자 조정은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진압·이주와 승려들을 통한 종교적 회유라는 채찍과 당근 전략을 구사한다. 체징 또한 조정의 고육책을 산문 세력을 넓히는 데 활용했음에 틀림 없다. 보림사 명물인 비로자나불 좌상을 신라 왕의 허락까지 얻어가며 김언경이 조성했다는 사실또한 그러하다. 강순형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은 “신라 하대의 정치 경제 사회상을 뭉뚱그린 탑비의 내용들은 사서못지 않은 기록유산”이라고 말한다.
가지산 자락에서 안개가 끝없이 내려온다. 탑비 위쪽 언덕의 보조선사 부도탑과 탑비 사이에도 어느덧 안개못이 자욱하다. 절을 무대로 난마처럼 얽혔을 1000여 년 전 정객, 승려들의 암투와 사상 편력을 떠올리게 하는 풍경이 아닌가. 18세기 문인 이하곤은 읊었다. ‘층각(대적광전)은 구름 속에 깊고/ 철불은 위엄있고, 장엄하며/ 신라 때 비석은 그대로 뚜렷하게 남아/석양 빛에 이끼를 피해가며 비문을 읽는다네…’
장흥/글·사진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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