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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다시(오른쪽 두번째)가 3일 오후 군수리 옛 절터의 발굴 현장에서 약 70년 전 자신의 발굴 일화를 관계자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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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가을날 ‘백제의 얼굴’ 잊을 수 없어”
“군수리 백제 불상을 발굴하던 날은 맑은 가을날이었습니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진흙투성이 두 손으로 금동보살상과 납석제불좌상을 파냈던 것입니다. 저는 너무 기쁘고 놀라워 두 불상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약 70년 전 발굴 당시의 감격을 100살을 바라보는 일본 원로학자는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사이토 다다시(97). 일제강점기인 1935~36년 충남 부여 군수리 옛 절터에서 ‘백제인의 얼굴’로 불리는 저 유명한 납석제불좌상과 금동보살입상을 발굴한 주역이다. 3일 낮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군수리 사지 발굴을 뒤돌아보며’란 제목으로 그의 방한 강연회가 열렸다. 사이토는 “당시 발굴 상황을 한국 연구자들에게 증언하고, 부여 유적에 대한 연구가 더욱 발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찾아왔다”고 운을 뗐다. 백제 고고미술사 연구의 한 획을 그었던 군수리 발굴의 추억담을 그는 차분하게 털어놓기 시작했다. “불교고고학자인 이시다 모사쿠(1894~1977) 선생과 함께 발굴에 참여했습니다. 부여 시가지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군수리는 백마강 변에 소나무 숲 우거진 마을로 풍광이 뛰어났지요. 부여고적보존회 회원들로부터 근방에 백제 기와가 많이 발견된다는 말을 듣고 도읍과 연관된 건물 터가 있을 것으로 보고 발굴에 착수한 거지요. 옛 문헌에 언급이 없어 절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트랜싯 같은 측량기나 흙 운반 컨베이어 등의 현대적 장비가 없어 손과 발만 놀려 일했고, 촬영도 유리원판 카메라로 했다”며 “후대 학자들이 조사할 수 있도록 중요 지점만 추정해 부분 발굴을 했다”고 회고했다. “불상을 발견한 건 36년 9월 2차 조사 때였습니다. 남쪽 기단 터 중앙부분 흙이 유난히 검은 빛을 띠고 있더군요. 제 경험으로 미뤄 무언가를 묻고 다시 흙을 덮었다는 생각에 그 부분만 파내려갔습니다. 처음엔 꽃삽으로 파내다 습기 많은 진흙이 계속 나와 직접 손으로 흙을 퍼냈습니다. 한참 퍼올리다 지하 1.2m 지점에서 금동보살상과 납석제불좌상이 나왔고, 더 파내려가니 한 변이 1m에 가까운 목탑 심초석이 드러났습니다. 제 평생 잊지 못할 순간들이었습니다.” 납석제불좌상·금동보살상 캐내키 넘는 저서 펴낸 97살의 현역
“죽는날까지 한국 고문화 연구” 사이토는 일본 근대 고고학의 산 역사이자 손꼽히는 한국통이다. 조선 총독부 박물관 소속으로 군수리 발굴에 나섰을 때는 27살의 패기 넘치는 청년 고고학도였다. 60여년이 흐른 현재도 그런 패기는 여전하다. 경주 분관장을 지낸 뒤 도쿄대 교수와 다이쇼대 교수를 지냈으며 지금도 시즈오카현 매장문화재조사연구소장으로 활동 중이다. <일본 장식고분 연구> <일본 고고학사 집대성> 등 150여권이나 되는 그의 평생 저서들을 쌓으면 자기 키의 두 배를 넘는다고 한다. 요사이도 새벽 5시에 일어나 연구서를 읽고 강의와 발굴현장 답사를 계속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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