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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10주기 맞아 남북 동시 추모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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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 10주기 맞아 남북 동시 추모식
‘상처받은 용’이 마침내 넋으로 귀환했다. 1967년 6월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고국에 끌려와 69년 3월 영구히 추방당한 지 36년 만이며, 95년 이국 독일 땅에서 생을 마감한 지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서거 10주기 기일인 3일 서울 조계사 대웅전과 북한의 대표적 사찰인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보현사에서 ‘용의 귀환’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동시에 열렸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윤이상과 유족의 뜻에 따라 불교의식으로 치러진 이 행사는 남쪽에서 공식적으로 여는 첫번째 윤이상 추모 행사다. 윤이상 10주기 행사위원회(공동대표 이홍구 통영국제음악제 이사장, 정동영 통일부 장관, 박재규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 주최로 열린 조계사 추모행사에는 유족 대표로 맏딸 윤정씨를 비롯해 박형규 목사(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미하엘 가이어 주한 독일 대사, 신낙균 민주당 수석 부대표,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등 각계 인사 200여명이 참석해 고인의 넋을 위로하고 사상과 업적을 되새겼다. 서울 조계사-북 묘향산 보현사 함께 ‘향불’추모연주회등 고인의 넋 위로하고 업적기려 이날 대웅전 안에서 열린 1부 추모식은 범종을 5회 타종하는 ‘명종’의식을 시작으로 묵념과 삼귀의, 반야심경 낭독, 조계사 주지 원담 스님의 축원, 이종수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의 고인 약력 보고, 원택 스님(조계종 종회 부의장)과 박형규 목사의 추모사, 안숙선 명창의 보렴 등의 차례로 진행됐다. 박재규 윤이상평화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이곳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 조계사에서 피어오르는 향불과 북녘 보현사의 향불이 아름다운 가을 하늘로 타올라가 구천에서 같이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형규 목사는 “윤이상은 한국의 젊은이들을 독일로 불러 음악공부를 시켰지만 어떤 제자도 윤이상에게 배웠다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앞으로는 ‘나는 윤이상의 제자다’라고 마음 놓고 얘기하는 시대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추모식에 이어 2부 추모연주회에서는 독일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이 윤이상의 <오보에 독주를 위한 ‘피리’>와 <첼로를 위한 7개의 연습곡> 중 제5곡 ‘돌체’ 등 다섯 곡을 연주해 20세기 현대음악계에 영향을 준 고인의 작품세계를 청중들에게 선보였다.
윤정(55)씨는 “아버지께서 평소에 동양 사상, 특히 불교와 도교 사상에 관심이 많았는데 한국의 대표적인 절인 조계사 대웅전에서 10주기 추모행사를 하게 돼 기쁘다”며 “현재 이 시각에 북한 보현사에서도 어머니께서 추모식을 하고 계신다. 아버지의 업적이 재평가되고 추모사업이 평화롭게 전개되었으면 한다”고 감회를 밝혔다. 이날 고인의 고향인 경남 통영에서도 추모연주회인 ‘윤이상 음악의 밤’이 열려 국내외 유명 연주단체들이 그의 창작곡을 연주했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윤이상은 세살 때부터 통영에서 자랐으며 33년부터 41년까지 서울과 일본에서 작곡과 음악이론, 첼로를 배우며 음악적 소양을 쌓았다. 56년 유럽으로 유학간 그는 59년 7월 서베를린 음악대학을 졸업한 뒤 활발한 작곡활동으로 유럽 현대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67년 6월17일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원들에 의해 베를린에서 서울로 끌려와 3심에서 10년형을 받았으나 69년 3월30일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석방된 뒤 독일로 추방당했다. 그는 77년부터 87년까지 베를린 예술대학 교수를 지내며 현대음악에 큰 업적을 남겼지만, 결국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오랜 투병 끝에 95년 이국 땅에서 눈을 감았다.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남북서의 연주로 문화대사 된듯” 추모공연 마친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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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연주 ‘베를린 윤이상 앙상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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