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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7 13:30 수정 : 2005.11.07 13:30

문예지들이 앞다투어 출간되기도 하고 한쪽에선 애옥살림으로 짚불 꺼지듯 사라지기도 한다. 폐간된 문예지로 등단한 작가들에게는 이 보다 억울한 일은 없을 터이다. 자기가 태어난 고향이 어느 날 사라져버린 기분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문예지의 폐간이 등단사실 자체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요즘 문단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회자되는 부분이 작가의 대량 생산이다. 일부에서는 그에 따른 작가들의 질적 저하와 수준 낮은 작품들의 무차별적 발표를 염려한다. 심지어는 문학적 공해라는 표현을 쓸 정도이다. 사이버 공간이 새로운 문학의 터로 비상하면서 그 비판의 수위는 한껏 높아졌다.

나는 이 사이버 문학공간을 통해 가만하던 문학의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삶의 고통스러운 부분들을 일기 쓰듯 연재하면서 수필이 무엇인지 거니채게 되었고 문학에 대해 서서히 부닐어 나갔다. 그래서 나는 수필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든 연재해보기를 권장한다. 연재 당시의 글들을 지금 읽어보면 형편없긴 하다. 비다듬어지지 않은 표현을 남발하는가 하면, 무절제한 감정으로 세련미란 전혀 없었다. 삶의 무게에 비해 사유는 왜 그리 경박했던지…. 그러나 그 글들을 부끄럼 없이 발표하였고 70여 편의 연재를 마무리할 즈음 수필에 대한 감각을 엔간히 익히게 되었다. 결국 마무리 시점에서 수필이라 의도하며 쓴 글이 데뷔작이 되어 문단과 인연을 한 셈이다.

예지의 난무로 등단이 평가절하 되어있다 하더라도 경시될 수 없는 다수의 영역이 존재한다.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이전보다 여물어진 글들이 나온다. 등단이나 작품집 출간이 아무리 흔하다 하더라도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이전보다 성숙된 글의 변화를 맛보게 된다. 물론 꾸준한 창작활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등단 작가들보다 탁필가인 비등단 작가들도 있을 테지만 어떤 장르든 한 문학 한다는 사람들은 등단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등단을 하고 문학회 등의 활동을 하다 보면 선배 문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성격의 작품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교류를 통해 자신의 문학적 성숙도를 어림잡아볼 수 있으며 그들보다 좀 더 향기 나는 글을 써야지 하는 욕심이 생기고 바로 그것이 문학의 추임새가 된다. 등단작가라는 책임의식도 좀 더 신중한 창작으로 이끈다.


반드시 완숙단계에서 등단하는 바는 아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등단 후 작품의 질적 향상이 두드러진 사람들이 여럿이다. 과실이 잘 익어갈 가능성이 있으면 미리 거두어 숙성시키는 이치이기도 하다. "여러분들에게 내려진 글을 잘 쓴다는 평가는 신인 수준에서 그렇다"라고 어느 심사위원이 말한 이유도 늘 겸손해 하며 등단에 자족하지 말고 더욱 정진하라는 의미였을 게다.

등단장사를 목적으로 하는 문예지의 무차별한 배출이 아니라면, 문단전체에서 작가의 대량 배출을 사시적인 시각으로 볼일만은 아니다. 가령 전 국민이 작가로 등단했다고 치자. 그만큼 문학인구가 늘었으니 문학계로 봐서는 좋은 일이다. 작가도 책을 사고 독서를 한다. 어쩌면 일반인들보다 독서량이 더할지도 모른다. 작가인 동시에 또 다른 작가의 애독자인 셈이다. 독서인구 부족에 대해서는 아쉽게 생각하면서도 문학인구가 늘어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몹시 인색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출판업계가 만성적 불황으로 허덕인 지 오래다. 한 달이면 수천 종류의 책이 쏟아지는데 그 중에서도 문학서는 몇몇을 제외하곤 판매량이 미미할 뿐이다. 국민들의 정서가 싸목싸목 메말라 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문학과 친한 사람들이 등단이라는 매체를 통해 대거 등장해도 나쁠 건 없어 보인다. 자신에게 문학이 있었기에 환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어느 선배처럼 문학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작가들은 피땀 흘리는 고뇌를 통해 자신만의 색깔 있는 작풍을 구축하고 그 작풍을 부지런히 가꾸어야 독자들의 사랑과 성원을 얻는다. 취미문학을 추구한다면 모를까 등단작가라도 스스로의 노력이 없으면 문단에서 도태될 뿐이다. 걸러진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을 듯싶다. 심영구님 수필집 '자미화를 보러간다' 중에서 '수필을 쓰려는 분을 위하여'의 일부 내용이다.

"…관객이 많아야 배우는 신이 난다. 지맥이 많아야 명산이 된다. 가지가 많아야 수세가 좋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수필인구가 많아야 그 중에는 용도 있고 이무기도 나온다. 세월이 가다보면 혹 용으로 비상하는 이무기도 있지 않을까. 무당이 굿을 하려면 굿판을 벌려 주어야 하고 칭찬을 해주어야 굿할 맛이 난다."

문예지의 편집일을 하기 전에는 문예지나 각 지역 문학회가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등단 회원뿐만 아니라 비등단 회원도 함께 활동하면서 등단이란 과정을 거치고 있었다. 등단이 강요되는 현실은 절대 아니다. 오랫동안 알아온 지인처럼 등단에 대해 관심이 없으면 관심 없는 대로 글을 쓰면 된다. 그러나 그도 문학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젠가는 등단하게 되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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