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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09 21:02 수정 : 2005.11.10 09:52

운주사 9층 석탑의 세부. 길쭉한 다층석탑 몸체에 새겨진 마름모꼴 무늬는 국내에는 전례가 없다. 하지만 몽골에서는 지금도 각종 공예품에 널리 쓰이고 있다.

민중 강제동원 ‘수난의 불사’ 후손들은 찬사를 보내니 역사의 심술인가

‘그들은 협곡 속에 숨어 살면서 미륵님의 계시를 들었다. 이 골짜기 안에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수도가 옮겨온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황토뿐인 야산에서 바위를 찾으려고 산등성이를 넘어가고 들판을 달리고 강을 건넜다. …집채만한 북을 골짜기 어귀에 걸어두고 산천이 떠나가라고 두드리면서 미륵상과 탑을 쪼아 세우는 노고를 온 세상에 알렸다. …세상의 모든 천민이여 모여라. 모여서 천불천탑을 세우자….’

이 시대의 글꾼이라는 소설가 황석영씨는 역사소설 <장길산>의 대단원을 전남 화순의 운주사 미륵 전설에 대한 이야기로 맺음했다. 무등산 줄기인 영귀산 계곡이 능주의 너른 들녘과 만나는 자리에 하늘에서 부린 듯 난데없는 모양새의 석탑과 불상들이 무더기로 박힌 이 절의 명성은 기실 그가 윤색한 미륵불 전설에서 비롯한 바 크다. 덕분에 오늘날 운주사는 인터넷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표제어가 뜨는, 가장 인기가 많은 답사터이며, 산 중턱에 처박힌 두 분의 와불이나 들머리의 구층석탑, 원반형 연꽃무늬탑, 석조불감 따위는 미륵불 신앙의 상징물처럼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전설의 후광을 걷어내면 고려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절의 내력과 전통 탑과 불상의 양식을 깡그리 무시해버린 천불천탑의 유래에 대한 정확한 정보는 거의 없다. 흔히 얘기되는 미륵 전설은 역사적 실체가 거의 없는 허구에 가깝다. 1980년대만 해도 촛불 켜고 사는 오지였던 절 부근의 주민들은 미륵전설 대신 이곳을 ‘중 장터’라고 불렀다. 즉 석탑과 불상들이 장마당처럼 널려 있다보니 각 절의 승려(중)들이 모여 석탑과 불상들을 사갔다는 우스개 민담이 구전된 것이다. 고금 기록에도 풍수 대가인 도선 스님과 관련된 기록들만 내력으로 주로 전해지고 있다.

‘도선이 배가 운행하는 형세인 우리나라의 각 지역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 비보진압했으며 운주사는 배에 해당하므로 천불천탑을 세워 진압했다.’(도선 국사 실록)

‘운주사는 절 좌우 산에 석불 석탑이 각 일천기씩 있고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앉아 있다.’(동국여지승람)

여기에 도선이 하룻밤 사이 도력으로 인근 돌을 불러모아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구전과 <동국여지지>에 혜명법사가 조성했다는 기록 등이 덧붙여지는 게 고작이다. 80~90년대 전남대 박물관 발굴조사로 이 절은 11세기께 처음 세워졌으며 석탑 등은 12~13세기 중기 이후에 건립했다는 점이 드러났을 뿐, 천불천탑 조성 경위는 수수께끼로 묻혀 있었다. 호족, 이민족, 천민, 노비 등 건립 주체를 둘러싼 억측들이 지금도 난무한다.

2000년대에 들어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천불천탑이 몽골의 고려 간섭기 때 원나라 군부가 고려 백성들과 물자를 강제동원해 세운 수난의 불사라는 외압설이 등장했다. 그 장본인은 석탑 전문가인 소재구 현 국립고궁박물관장이다. 2001년 동원학술대회에 발표한 논문 <운주사 탑상의 조성불사>에서 그는 천불천탑 조성은 엄청난 재원과 석공인력의 동원이 필수적이었을 것이라며 이렇게 적고 있다.

“불상과 탑들의 스타일이 천편일률적이라는 점은 원 침략기 수많은 석공들이 단기간에 완성한 것임을 알게 한다. …원래 몽고인들은 티벳불교의 영향으로 다탑 조성의 관습이 있었다. …당시 고려 왕조가 원과 전쟁 끝에 화친한 뒤에도 계속 항전하는 삼별초 군단들이 진도를 거점으로 서남해 지역에서 항전을 계속했기 때문에 운주사는 서남해의 대몽항쟁군에 맞서는 원 군부의 주둔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나주 평야에서 군량미를 동원할 수 있고 영산강 포구는 국제적 항구여서 중국, 고려 왕경과 교류할 수 있었다. 원 군부는 운주사에 강제로 인력을 동원시켜 탑과 불상을 만들고는 타국에 나온 원나라 군사들의 무운을 빌고 삼별초에 대한 전승을 기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이 설득력이 있는 것은 다층 탑에 엑스(X) 자나 마름모꼴 무늬를 새긴 생소한 탑의 문양 자체가 몽골 전통 건축이나 공예물, 현재의 우표에까지 활발히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운주사 불사는 원나라 군대가 자기네 나라의 모델을 제시하고 석공과 백성들에게 단기간에 완성하라고 막무가내로 몰아부쳐 이뤄진 유산일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다. 기초 공사 없이 바위 같은 데 아무데나 불상과 석탑을 놓은 운주사 천불천탑의 특징 또한 군대가 단기간에 기념물 건립을 강압적으로 재촉했다는 전제 아래서 풀리게 된다. 우리 사서에 전하지 않는 것은 결국 우리 문화사의 정수가 아니었던 타율적 불사였던 탓이라는 주장이다. 소 관장의 추론은 추가 논의가 더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천불천탑의 역사가 민중의 주체적 역사가 아니라 민중을 착취하는 고통의 불사였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맺힌 천불천탑의 탄생이 훗날 전혀 다른 의미로 찬양받게 된 셈이니 역사의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화순/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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