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16 18:28
수정 : 2005.11.1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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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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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
‘나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문장은 위험하다.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곧 이기적이고 삭막할뿐더러 비인간적인 품성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탓이다.
그러나 어찌하면 좋으랴. 시험대는 도처에 널려있다. 가장 자주 맞닥뜨리는 당황스런 시추에이션은, 귀엽고 해맑은 얼굴의 어린이가 공공장소에서 ‘난동’ 수준의 땡깡을 피워대는 것. 음식점 홀을 육상트랙 삼아 엄청난 속도로 뛰어다니는 아이, 영화관 안에서 오 분에 한번씩 “엄마, 여기 답답해, 나가자” 고 칭얼칭얼 졸라대는 아이가 이 도시 곳곳에 가득하다. 물론 그 정도는 약과다. 세상에는, 길 한복판에서 낯모르는 어른의 허벅지를 느닷없이 가격하는 아이도 있고, 갑자기 바지춤을 내리고는 비행기 복도에다 천연스레 ‘쉬’를 갈기는 아이도 있는 것이다.
이 어린이들의 특징은, 일을 친 다음엔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순진무구한 얼굴을 흐트러트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한마디 야단이라도 치자면 구원투수처럼 어디선가 홀연히 나타나 막아주는 든든한(?) 부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괜히 커다란 어른싸움으로 번지지 않으려면, 또한 ‘뭘 모르는’ 아이의 작은 행동에 발끈하는 속 좁은 인간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면, 어린애들의 엔간한 소란 정도는 꾹 참고 넘어가는 것이 성숙한 시민의 태도라고 간주하여 왔다.
그런데 몹시 이상한 일이다. 어디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이 아이들이 그동안 텔레비전이나 영화 같은 대중매체 속에는 왜 절대로 나오지 않았던 걸까? 대중문화 속에서 재현 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대개 두 가지뿐이었다. 달콤한 동화 속에서 막 뛰어나온 것처럼 초롱초롱하고 맑은 눈망울을 반짝이는, 오동통하고 뽀얀 뺨을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 그리고 주로 어른들의 극적 갈등을 유발시키는 대상이 되는, 가련한 희생양으로서의 아이.
드라마나 영화 뿐 아니라, 오락프로그램 등에 등장하는 ‘현실의 아이’ 이미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G.O.D의 ‘육아일기’에 나왔던 잘생기고 순한 아기 재민이를 기억해보라. 그러나 얼마 전부터 이 오래된 약속을 와장창 깨 버리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다. 주말저녁, 평온한 식사를 마치고 느긋하게 티브이를 켠 시청자들을 대혼란에 빠트린, SBS ‘실제상황 토요일’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가 그것이다.
거친 욕을 툭툭 뱉어내는 아이, 누나와 엄마에게 발길질을 일삼는 쌍둥이 형제, 낡은 이불쪼가리에 집착하고 화나면 자해행위를 하는 아이를 보면서 시청자는 기막힘과 동시에 모종의 통쾌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역시 저런 이상한 애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 아니었어!’) 그러나 이 프로그램이 내세운 거창한 목적은 아이들의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자체가 아니다. 이 아이들의 문제점의 근원을 진단하여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제목 그대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훌륭한’ 공적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행동은 ‘병’으로 규정되고, 그 원인은 가족 내부의 문제로 돌려진다. 잘못은 부모의 잘못된 육아태도 탓이라는 거다. 또한 교화는 어른의 눈높이로 진행된다. 발차기 브라더스는 해병대로 보내 혹독한 훈련을 거쳐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한다. 자해의 버릇이 있는 귀여운 소녀에게는 자기 머리통 대신 때릴 수 있는 모형 샌드백을 마련해준다.
하지만 겉으로는 완벽하게 달성된 듯 보이는 어른들의 이 해결책이 정작 당사자인 아이들에게는 어떤지 잘 모르겠다. 작은 폭력을 더 큰 폭력의 구조 앞에 굴복시키는 방법, 자학을 가학으로 돌리게 만드는 방법 등이, 그 애들이 살아갈 길고 긴 삶에서 과연 어떤 성장의 계기가 될까? 어쨌든 이 프로그램이 출산율 저하를 위해 기획된 모종의 프로젝트라는 항간의 농담이, 가끔은 섬뜩한 진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정이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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