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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1.23 20:41 수정 : 2005.11.24 16:32

허문영 영화평론가

저공비행

20년 넘게 기차를 타고 서울-부산을 종종 오간다. 오가며 차창 밖 풍경을 보면,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데도, 별로 아름답지 않다. 20년전에는 마음을 적실 만한 소박한 풍경도 있었지만 더이상 없다. 가을 들녘은 매혹적이지만 외모를 무시한 집들은 그나마 제각각이며, 푸른 비닐과 노란 물탱크와 뒤엉킨 전선들이 눈을 어지럽힌다.

기차간에서 지난 19일자 <뉴욕타임즈>의 소위 ‘혐한류’에 대한 분석 기사를 소개한 신문에 눈이 멈췄다. 거기엔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 <혐한류>가 한국에 대한 경계심리와 서양에 대한 일본인들의 열등감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같은 기류의 바탕에는 메이지 유신 시절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이 작용한다고 적혀 있었다. 탈아입구론은 서양 제국주의를 이기는 길은 서양이 일본을 조선, 중국과 똑같이 보지 않도록 이들로부터 떨어져 서양을 닮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정작 눈길을 끈 건 덧붙여진 대목이다. 만화 <혐한류>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서양인의 외모를 닮았다. 이 신문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 만화 등에 등장하는 일본인들이 높은 코와 큰 키 등 러시아인들보다 더 유럽적인 특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이 역시 탈아입구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한다.

이미지를 정치의 결과로 본 이 분석은 명료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진 않은 것 같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모두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군국주의를 혐오하는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난 일본이 싫었다. 전쟁을 통해 가족이 돈을 벌었고, 전쟁을 통해 일본이 잘못된 생각으로 가득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가 일본 군국주의의 바탕이 된 탈아입구론에 동의하진 않을 것 같다.

그럼에도 미야자키는 유럽에 매혹된 사람이다. <붉은 돼지>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공간은 눈이 시릴 만큼 아름답다. 그 모델은 명백히 유럽의 오래된 도시다. <이웃집의 토토로>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처럼 일본의 서민 가족이 주인공인 작품도 있지만, 그의 애니메이션은 종종 유럽의 도시를 이상적인 곳으로 그린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왕자는 유럽인의 외모를 지녔다. 그는 아마 베니스나 피렌체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탈리아와 비행기를 좋아했던 그는 자기 회사의 이름도 2차대전 때 이탈리아 정찰기의 이름을 따서 ‘지브리’라고 지었다.

나는 미야자키의 취향에 불만 없다. 오히려 좋아한다. 그의 취향은 실은 우리의 취향이기도 하다. 우리의 텔레비전 드라마는 파리와 프라하를 순례하며, 광고에 나오는 고급 아파트들은 대개 유럽의 도시에 지은 것처럼 꾸미고 있다. 아예 영국이라고 못박은 광고도 있으며, 아파트가 선 거리엔 유럽인들이 태연히 거닐고 있다. 어떤 신용카드 광고는 그 카드를 만들면 서양 애인이 생길 것이라고 유혹한다. 이 유혹의 기술들은 애국적이진 않지만 그걸 따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는다.

이미지에 관한한 탈아입구는 우리의 오랜 시각적 욕망이다. 우리의 결여는 실은 일본이나 중국, 심지어 동남아시아보다 깊다. 한국은 세계 미술사에서, 그들과 달리 어떤 시각적 양식을 각인시키지 못했다. 예컨대 일본은 아르누보를 배태한, 그리고 드가와 고호를 매혹시킨 시각적 양식을 남겼다. 우리의 경우엔 그나마 지속되던 일상 공간의 소박미마저, 지난 수십년간 애타게 지워왔다. 그 결과가 저 차창 밖의 어지러운 풍경이다. 그걸 보고 있으면 유럽의 철길을 달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다. 결여는 결여로 수긍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지역성과 역사성이 무화된 근대의 이미지, 반짝거리며 매끄러운 것을 향한 강렬한 집착은 아마도 우리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새로 지어진 기차 역사의 차갑고 미끈한 금속성 이미지는 그래서 불가피할지도 모르겠다. 그 편이, 기차가 도시를 지날 때마다 등장하는, 유럽의 고성을 어설프게 모조한 몇몇 예식장과 모텔들의 저 조악한 탈아입구 이미지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허문영/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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