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생일을 모르고 살았는데 어리둥절하다"
"평생 생일을 모르고 살았는데 어리둥절합니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는 29일 낮 장충동 신라호텔 라일락룸에서 열린 팔순잔치에서 "자식 체면 때문에 하라고 했지만 이렇게 거창하게 할 줄 꿈에도 몰랐다"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당초 가족과 평소 가까웠던 사람 스무명 정도와 조촐한 잔치를 기대했다가 예상밖으로 많은 손님이 초대된 것에 다소 당황스러워했다. 박씨는 "솔직히 여기에 선 것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다른 사람보다 오래 살아 염치가 없고, 작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는데도 보상을 못받고 떠난 사람에 비해 나는 한 일보다 더많은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라며 꼿꼿한 작가정신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면서 "죄송하고 고마울 뿐"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행사에는 딸과 사위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과 시인 김지하 씨, 외손자인 김원보ㆍ세희 형제 등 가족과 문인, 정ㆍ관계, 학계, 언론계 인사 등 평소 박씨와 가깝게 지낸 100여명이 참석해 건강과 장수를 축원했다. 사회를 맡은 문학평론가 정현기 연세대 교수는 "박경리 선생의 '토지'는 능동성을 잃으면 자아가 죽는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선생은 80년간 삶을 지켜오면서 작품과 일상의 사소한 것에서 존재가치의 영성과 드높은 존엄성을 드러내 왔다"고 평했다. 이어 국악인 김영동 씨가 이끄는 경기도립국악단의 가야금 산조가 연주됐고, 장석효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청계천 복원에 대한 공로패를 이명박 시장을 대신해 전했다.행사장에 온 이수성 전 총리는 "평생 가장 감명깊게 읽은 소설로 홍명희의 '임꺽정'과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들 수 있다"면서 "선생의 작품은 참다운 민족의 자부심을 느끼게 했으며,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 '박경리 선생이라면 찬동할까'라고 생각할만큼 선생은 삶의 좌표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가 최일남 씨는 "박 선생을 만날 때마다 글쓰는 모습보다 호미 들고 밭 매는 모습을 봐왔는데 거칠고 험한 작가의 손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고 했고, 박완서 씨는 "건강하고 젊고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으면서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하고 살고 싶다는 점에서 선생은 나의 희망"이라고 박씨의 지나온 삶에 존경심을 표시했다. 지난해 두 달반 동안 토지문화관에서 집필활동을 했던 소설가 박범신 씨는 "밤늦게 토지문화관으로 돌아올 때 깜깜하고 막막한 깊은 산속에서 오직 2층 선생의 서재에만 불이 켜져 있었다"면서 "그 불빛을 등대처럼 생각하며 문학의 길을 찾으려 했다"고 한국문학사에서 박씨가 차지하는 위치를 '등대'에 비유했다. 사위인 김지하 씨는 "환갑도 칠순잔치도 굳이 사양해서 못했다"면서 "해드린 것 없이 고생만 시켜 드렸다"고 말했다. 김씨와 절친한 이부영 전 의원은 "(수감생활로) 자유롭지 못할 때 '토지'를 읽었는데 박 선생이 '우리는 분단돼 있지 않다'고 말하듯 분단에 개의치 않고 거침없이 집필한 것은 깊은 감동을 줬고, 대륙쪽으로 열린 시각을 잃지 않도록 했다"고 작품의 의미를 되새겼다. 이날 행사에는 김상현 전 의원, 김한길 의원, 김병수 정창영 연세대 전현직 총장, 유재천 한림대 교수,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김성우 전 한국일보 주필, 장명수 전 한국일보 이사, 조상호 나남출판 대표, 양숙진 '현대문학' 대표, 진의장 통영시장, 최열 환경재단 대표, 김민기 학전 대표, 영화감독 이광모 씨, 작가 오정희 강석경 황지우 강형철 김남일 씨 등이 참석했다. 팔순잔치를 치른 박씨는 1926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1955년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그동안 소설 '표류도' '김약국의 딸들' '파시' '시장과 전장', 시집 '못떠나는 배'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1969년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한 대하소설 '토지'는 집필을 시작한지 25년만인 1994년 전체 5부를 완성한 대작으로 한국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정천기 기자 ckchung@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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