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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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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공비행 - 정이현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흠칫 놀랐다. 청룡영화제의 오프닝 무대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거리를 걷다가, 때 이른 캐롤송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종류의 불안감이 엄습했다. ‘세상에. 또 한 해가 지나버렸단 말인가!’ 어쨌거나, 바야흐로 연말 시상식의 계절이 시작되었다. 따뜻한 방구석에 앉아 텔레비전 화면 속의 시상식을 구경하는 일은, 물론 재미있다. 특히 눈이 호사스럽다. 새 영화 홍보를 위해 생뚱맞은 오락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걸 제외하고는 브라운관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젊은 영화배우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모습 속에는 확실히 평범한 관객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은밀한 매혹의 요소가 숨어 있다. 사실 ‘최고’의 영화, 감독, 배우를 딱 하나씩만 뽑는다는 일의 불가능성에 대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친구 서넛이 같은 작품을 보고 나와서도 극단으로 엇갈릴 수 있는 것이 영화에 대한 평가이니 말이다. 상을 주는 행위도 받는 행위도 어차피 인간의 일일 터. 창의력 00%, 기술력 00% 등등을 기계적으로 채점하는 컴퓨터가 심사위원이었다면, 단언컨대 다섯 명의 후보를 호명하는 순간 지금과 같은 팽팽한 극적 긴장감이 감돌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시상식이라는 행사가 관객에게 주는 진짜 선물은, 맘껏 투덜거릴 수 있는 자유가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상패는 A에게 돌아갔지만 실제로는 B의 연기력이 훨씬 출중했다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B가 배제된 이유는 출연한 영화의 흥행이 안 되었기 때문이며 상대적으로 신인인 A에게 수상함으로써 주최 측이 깜짝 효과를 의도했다는 음모론에 이르기까지. 큰 시상식이 하나 끝난 후에는 주인 없고 책임 없는 ‘말, 말, 말’ 만 남아 강호를 어지러이 떠돈다. 11월 29일 거행된 청룡영화제를 보는 동안 계통 없이 떠올랐던 내 머릿속의 물음표들도 이런 투덜거림의 일종일 것이다. 첫 번째 의문. 왜 진행자로 꼭, 남자와 여자 커플을 기용하는 걸까? 이젠 제발 남녀 한 쌍을 이루어 서 있어야만 그림이 된다는 진부한 강박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똑 부러진 여배우 두 명이 공동사회를 보아도 좋고 (개인적 취향으로, 김혜수-김정은 커플을 추천한다) 제작자나 감독 등을 기용해도 새로울 것이다. (박찬욱-장진 커플이 진행하는 영화상 시상식을 상상하며 흐뭇해하는 나는 진정 머리에 총을 맞은 걸까?) 두 번째 의문. 각 부분마다 상을 주러 나오는 그 분들. 역시 남-녀 한 쌍으로 이루어진 그들은 대체 왜, 그토록 썰렁하기 그지없는 멘트를 어색하고 부자연스럽게 주고받아야 하는 걸까? 대한민국 최고의 남녀배우들이, 외워서 말하는 사람도 참 쑥스럽겠다 싶을 만큼 진부한 대사를 교환하는 장면을 보면 괜한 닭살이 돋아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어진다. 뭐, 노골적인 자기 영화 홍보에 비하면 차라리 양반일지도 모른다. “제 옆에 계신 배우 A씨, 이번에 무슨 영화 찍으셨다고요? 정말 기대됩니다.” “네. 제목은 00이고 내년 0월에 개봉입니다. 좋은 영화입니다. 많이들 보러 와주세요.” 아니. 당신들 여기 왜 나온 거야? 사람들은 지금 이 시상식의 하이라이트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고!! 이쯤 되면 홍보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진리만이 뼈아프게 확인된다. ‘트로피의 발가락 몇 개만 내 몫’ 이라던 배우 황정민의 수상소감, ‘호오가 갈리는 영화였지만 이 자리에서만은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다’ 던 이영애의 눈물을 화제로 남기고 시상식은 모두 끝났다. 2005년의 청룡영화제가 이 두 가지 장면으로 기억된다면, 그 순간 우리가 훔쳐본 것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한 인간의 맨얼굴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찰나의 공감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어김없이 다음 시상식을 기다린다. 오호! 대한민국 영화대상이 내일모레란다. 정이현/소설가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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