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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12 17:08 수정 : 2005.12.12 17:08

현재 해인사 보경당에 안치되어 있는 두 구의 비로자나불상. 왼쪽 것이 대적광전, 오른쪽이 법보전 비로자나불상이다.

미술사·서지학계 중진들 학술대회 대적광전 불상과 만든시기도 달라 진성여왕-위홍 쌍불 발원설 부정

팔만대장경 판전이 있는 경남 합천 해인사는 지난 7월4일 판전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상이 국내에서 가장 오랜 9세기 통일신라 목조불상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비로자나불은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상과 모양, 크기가 거의 같아 만든 배경을 놓고 새삼 의문을 낳았다. 중화 3년인 883년 만들었다는 조성경위를 불상 내부 복장에 적은 묵서명에 대각간과 비가 발원했다는 구절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호사가들은 통일신라말 진성여왕이 해인사를 정부이자 삼촌인 대각간 위홍의 추모 원당으로 삼았던 내력을 내세워 여왕과 위홍의 정분을 기려 함께 만든 쌍동이불이 아니냐고 입방아를 찧었다. 과연 그 추론은 맞는 것일까.

약 다섯달 뒤 전문가들이 머리 맞대고 내린 결론은 다소 부정적이다. 10일 해인사 보경당에서 열린 학술강연회 ‘9세기 해인사 비로자나불의 역사성과 예술성’에 참석한 미술사·서지학계 중진들과 보존과학자들은 두 불상은 만든 때가 명백히 다르며, 진성여왕의 염문에 조성 배경을 맞춘 것은 명확한 근거가 없다고 입을 모았다. 복장물과 불상 양식에 대한 사전조사·교감 없이 내용을 공표한 사찰쪽의 성급함에 대한 질책도 쏟아졌다.

‘해인사와 신라 왕실의 후원’을 발제한 김상현 동국대 교수는 여왕과 위홍의 쌍불 발원설을 정면 부정했다. 그는 “진성여왕이 위홍을 추모한 원당을 세운 것은 사실이나 사통한 사이인 그들이 나라의 존망이 어지러웠던 신라말기에 정분을 기리는 쌍불을 만들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폈다. 그는 “888년 숨질 당시 각간이었던 위홍이 묵서명에 언급된 5년전 883년에도 대각간이었는지는 의문”이라고 했다. 토론자인 조범환 서강대 교수도 이에 동감하는 의견을 내놓았으나 남풍현 전 고문서학회장은 “묵서명 대각간은 헌강왕 1년인 875년 상대등 지위에 오른 위홍으로 봐야하며, 비란 명칭도 왕비와 배필의 뜻이 있으니 왕의 친여동생이면서 장차 왕위에 오를 만한 위치에 있었던 진성여왕으로 보는 것도 옳을 것”이라는 견해를 폈다.

불상 조성시기에 대해 강우방 이대 교수는 대적광전 불상이 국내 최고로 발표된 법보전 불상보다 더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파격적 주장을 내놓았다. 후덕한 인상이나 결가부좌한 하반신 옷주름 표현양식 등이 8세기말~9세기초에만 보이는 양식이므로 대적광전 불상은 802년 해인사 창건 당시 본존불이었을 것이며 법보전 것은 80여 년 뒤 이를 본떠 만들었다는 논지다. 두 불상의 재질과 제작 연대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박상진 경북대 임산공학과 교수의 발표는 정반대였다. 서울대에 있는 질량분석이온빔가속기(AMS)로 연대 측정한 결과 법보전과 대적광전 불상의 조성연대가 95.4%신뢰한계에서 각각 740~950년대와 950~1090년 전후로 나타나 법보전 불상이 대적광전 상보다 100~200년 정도 앞섰다는 것이다. 대적광전 불상의 경우 표본 데이터 수치가 일부만 적용되어 결론을 일단 유보하자는 제안(박원규 충북대 교수)도 있었다. 불상 표본을 과학적 연대측정한 것은 이번이 첫 사례다. 김리나 홍대 교수는 “두 불상은 고려, 조선시대 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8~9세기 시대양식”이라며 “중국, 신라의 8~9세기 불상과 9세기 경북 지방의 상들, 고려, 조선초 상들의 양식을 비교해 문제를 풀어야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합천/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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