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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2.21 18:43 수정 : 2005.12.22 14:10

분원 초등학교 옆 언덕에 늘어선 조선시대 분원 감독관(제조)들의 송덕비. 원래 강변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채제공, 김수항 등의 낯익은 중신들 이름도 보이지만 일왕 연호가 새겨진 일제시대 면장 칭송비도 섞여 고개를 갸웃거리게 한다.

조선 백자 양산했던 산실…일제때 폐쇄돼 쓰리게에 묻혀 뒤늦게 백자관…면목은 세웠네


“도자기 공방이 강변에서 10리나 떨어져 땔 나무를 가마까지 운반하는 데 드는 비용이 한해 기천냥 남짓이나 됩니다. 번조소(그릇 공방)를 우천 강변으로 옮기면 이런 폐단은 풀릴 것입니다.”

붕어찜 식당가로 더욱 유명세가 높은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가 조선 백자의 성지가 된 것은 270여년전 영조에게 바친 이 건의안에서 비롯되었다. 행정기구 비변사의 <비변사첨록>에 전하는 1726년의 건의안에 따라 국내 최상급 백자를 만드는 왕실 공방인 분원은 남쪽 금사리로 갔다가 1752년부터 구한말까지 분원리 시대를 열게 된다. 15세기 말 분원이 생긴 이래 땔나무를 찾아 광주 일대 300여 개소 가마터를 전전하다 결국 상류에서 띄운 뗏목을 조달하기 용이한 분원리 포구변에 영구 정착했던 것이다. 한강 지류 경안천이 양수리의 남북 한강물과 합수하는 자리인 분원리의 가마터들은 20세기 초 한일병합 때까지 무려 150여년간 숱한 걸작 백자들을 양산했다. 1996년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동양 도자사상 최고가인 824만달러에 낙찰된 ‘철화백자용문호’ 는 바로 이곳이 출생지다.

한강변으로 뻗어내려온 건지봉 기슭에 양수리의 강변 풍경이 그윽하게 펼쳐지는 이곳에는 380여명 정도의 도공들이 식솔들과 함께 살며 각종 백자 기물들을 대대로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오직 도자기 제작에만 전념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사적인 판매는 엄격히 통제를 받는 반노예 상태의 천민들이었다. 1867년 간행된 <육전조례>를 보면 당시 쇠퇴기였음에도 해마다 1만3720개의 사기가 봄가을 진상되었다고 보고되어 있다. 거의 한숨돌릴 여가 없이 일을 했던 셈이다. 숙종 때 이하곤의 문집 <두타초>를 보면 당대 분원 장인들의 신산한 삶을 생생하게 저술하고 있다.

‘요인들은 산모롱이에 사는데/오랜 부역에 괴롭다네…감사가 글을 올려 노역은 덜었지만/진상품은 해마다 퇴물이 많아지네…수비정토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돌고/잠깐 사이 천여개 빚어내니/우, 완, 병, 앵 하나같이 둥그네/진상할 기명은 삼십여종이요/본원에 바칠 인정은 사백 바리인데, /정교하거나 거칠거나 색과 모양을 말 말게/바로 돈 없는 게 죄일세…’

분원리에서 만들었던 자기들은 문인 취향의 청화백자 자기들로 주로 왕실에 납품되었지만, 맑은 빛의 백자에 눈독들인 외척과 관료배들의 착취 또한 만만치 않았다. <정조실록>43권에는 정조 19년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의 긴급한 보고가 눈에 띈다.

“사옹원 제조(감독관)들이 왕실에 보내는 자기외에 별도로 기이하고 교묘한 모양의 그릇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분원의 폐는 백성과 고을이 감당하지 못할 뿐아니라…갑번그릇을 씌운 최상급 도자기를 금지한다고 왕명을 내렸는데도 온갖 계책으로 아래 관속들의 이익이 없어진다면서 예전대로 하자고 대놓고 어전에서 말하니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정조 당대 사치풍조의 유행으로 호화스런 별번, 갑번 자기가 증가하자 관료들과 아전들이 장인과 백성을 등치는 사례는 계속 빈발했다. 게다가 정조 사후 세도정치 시대에는 왕실의 무관심과 관리들의 부패로 현장 장인들을 감독하는 변수라는 직책을 민간 상인들이 도맡으며 각종 폭리를 취하는 등의 폐해가 심해졌다고 사서는 전한다. 왕실 행사에 쓰일 기물의 비용과 운영을 감당하지 못한 데다 개항 뒤 일본 자기업자들까지 진출하자 왕실은 1884년 12인의 업주들에게 민영화 관리권을 이관하고 만다. 영롱한 빛을 발하던 이곳 생산 자기들도 졸지에 하급품으로 품질이 조락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1900년 당시 생산된 조선 백자를 관찰한 러시아 대장성 관리들이 <한국지>라는 책에 생생한 품평을 남겨놓고 있다.


“…현재 조선의 도토 제품들은 조잡하고 도기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려 자기와 도기의 구별조차 곤란해졌다. 현금 조선의 조잡한 자기 제품을 목격할 때 과거 조선의 도자가 발달하여 현재까지 높은 수준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그 기술을 전수해주었다고 상상할 수가 없다…”

분원리 분원 가마터에는 비참한 후일담이 이어졌다. 1920년 가마터는 폐쇄되고 그 위에 분원 소학교(오늘날 분원초등학교)가 콘크리트 건물로 세워졌다. 몇몇 가마터 구덩이에는 쓰레기장이 2000년대까지 오랫동안 들어서 도자 조각과 쓰레기가 뒤섞인 채 방치되는, 능욕에 가까운 버림을 받았다. 80년대 이후 일부 지역을 사적으로 지정했지만 붕어찜 식당과 행락시설, 러브호텔들이 몰려오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다행히 2001년부터 3년간 이화여대 박물관에서 조사를 벌여 대형 가마터 3곳과 공방터, 25개층의 파편 퇴적층을 찾아내는 성과를 올렸다. 쓰레기장의 수난사를 접고 2003년부터는 옛 소학교 건물에 분원 백자관이 들어서 선대 도공들을 볼 면목은 세운 셈이 됐다. 하지만 지금 분원리에서 백자 파편 더미 외에 그 시절 도공의 후예들을 만날 길은 없다. 얼어붙어 눈부시게 빛나는 강과 그 너머 보이는 양수리 산록의 담담한 자태만 변함없을 뿐이다.

광주 분원리/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끝>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묵향 속의 우리 문화유산’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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