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의 비운이 죽어서까지 계속되지는 않았다. 1776년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왕위에 등극하자 이곳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능인 수은묘를 영우원으로 높여 부르고 경모궁이라는 사당을 세워 아버지의 비운을 달랬다. 그래서 배봉산은 경모궁이 있던 역사적인 곳이 된 것이다. 후에 정조는 왕권을 확립한 후, 아버지의 능을 이곳 배봉산으로부터 경기도 화산(現 화성군)으로 옮겨 현릉원이라 이름한 후, 1799년에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능을 융릉(융성하게 기리시라)이라 칭하게 된다. 정조대왕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융릉의 조성과 화성의 건축 등을 통해 역사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비운을 보면서 자란 정조는 당쟁의 한 가운데서 최대의 피해자가 되었던 자신의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착실하게 왕권을 안정시키고 결국 아버지의 한을 풀어주게 된다. 특별한 효심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대의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이 틀림없다. 10여 년 전 대학생들을 데리고 국토순례를 하면서 화성과 융건릉에 들린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아버지에 대한 고귀한 사랑 - 화성편”이란 기행문을 써 두었다. 그 서문에서 난 “도심 내부를 두르고 있는 화성의 모습에서부터 조선 왕조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정조 대왕의 아버지(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이 깊이 배어 있는 곳이어서 우리의 순례길을 멈추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그 기행문 중에는 화성의 축조와 융건릉의 조성에 대한 역사적인 기록을 남기기 위해 자료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해 두었다. “정조는 영조를 이어 즉위하지마자 어버이의 고혼을 위로하기 위해 양주의 배봉산으로부터 유해를 수원 남쪽 화산으로 옮기고 수원 천도 계획과 함께 화성을 건축하였다.” 이 때 내가 나의 기록에 남겨둔 양주의 배봉산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나의 연구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이라는 걸 단 한 번도 인식해 보지 못했다. 이곳에서 근무한 지 3년이 지나고 있건만 나는 한 번도 이 배봉산과 사도세자의 비운을 연결시켜보지 못했다. 아니 이곳에 위치한 위생병원과 오래 전부터 인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배봉산과 사도세자의 수은묘를 연결시켜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그 연결점을 찾아서 다행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잊어버리거나 혹은 무심코 지나치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역사, 역사의 의미를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는가? 역사는 현대인들에 의해서 되새겨질 때에만 그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사라진 역사, 묻혀진 역사는 항상 비운 속에 잠들어 있기 마련이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와도 같이 누군가의 달콤한 키스에 의해 깨어날 때에만 비로소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그렇다. 지금도 우리의 삶, 곳곳에서 역사는 누군가의 숨결을 기다리고 있다. 배봉산, 그건 나의 산책로이자 휘경동 주민들의 자연학습장이기 이전에 사도세자의 수은묘가 있던 곳이다. 아니 역사의 비극이 묻혀진 곳이다. 그 비극의 역사를 되새기지 않는 한 그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계속되어져 왔다. 오늘 우리의 삶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쟁과 모함, 농간 등은 그 비극의 역사를 되새기지 않은 결과이다. 역사의 과오가 또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 우린 부지런히 역사를 살펴야 한다. 역사가 이미 제시한 해법을 찾아내고, 그 역사의 교훈에 따라서 발전하는 미래를 열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하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자로서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다. 나의 3년의 삶이 이렇듯 무책임하게 흘러가버렸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래도 올 해가 가기 전에 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되어서 천만 다행이다. 날씨가 비록 춥지만 서둘러 배봉산에 올라 역사의 비극을 돌아보고, 미래의 삶을 다시 다잡아야겠다. (*이 기사는 네티즌, 전문필자, 기자가 참여한 <필진네트워크> 기사로 한겨레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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