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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17 17:43 수정 : 2006.01.17 17:43

전설의 인권변호사 ‘조영래 평전’
1년 후배 안경환교수 5년간 집필
유족 “주관 지나쳐 새로 내겠다”

<조영래 평전>(강 펴냄)이 나왔다. 15년 전 43살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영래(1947~1990) 변호사(‘조변’)의 서울대 법대 1년 후배 안경환(58) 전 서울대 법대 학장이 지난 5년간 공들여 썼다. 대학 재학시절 경기고 동문들의 반대로 학생회장 출마조차 포기하는 ‘비주류적’ 삶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 시대의 가장 순결했던 인권변호사”(작가 김원우) ‘조변’은 이제 사법연수원생들 설문조사에서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를 젖히고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 1위를 차지하고 모교에 그의 이름을 딴 기념홀까지 생길 정도로 세상이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잘 모른다.

“이 땅의 민주화운동사에서 조영래가 차지하는 위치를 한국문학사에서 김수영의 자리에 비유해도 좋을 것이다. 조영래의 사후에 민주화운동 세력은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그러나 그 각각의 갈래 모두 조영래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441쪽)

일각에서 전설처럼 회자하는 그에 대한 숱한 언설과 익명으로 남은 학창시절 성명서 등의 문건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연수원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나와 쓰기 시작한 <전태일 평전>(1976)과 유고집, 변론선집 등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가 누구인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체계적으로 짚어준 글은 없었다.

저자는 엄청 담배를 피워댔지만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술자리는 지키며 끊임없이 낙서를 끼적였던 무서운 집중력의 소유자 조변을 한국 민주화운동사의 ‘중시조’쯤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는 조변과 자신의 시대를 체험하지 못한 세대를 주된 독자로 삼았다면서, 자신이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람’이고 법학자로서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쌓아왔다는 점에서 용기를 얻어 감히 도전했노라고 밝혔다.

평전은 경북 청송 촌놈이 누나 따라 상경한 뒤 경기중·고에 들어가고 절로 가출도 하고 한·일회담 반대시위 주도자로 정학도 당하다가 서울대 수석합격 이후 어떤 시대 속에서 어떻게 살다 갔는지 ‘통합적 지성의 소유자’ 인간 조영래의 행적을 저자의 ‘박람강기’에 토대를 둔 다양한 인용문과 함께 엮어간다. 그래서 책은 1960~80년대 격동기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기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결과물에 대해 유족들 표정이 흔쾌하지 못하다. 애초 안 전 학장에게 평전을 위촉했던 유족 쪽은 16일 저자의 주관적 시각이 강하게 반영된 서술 방식에 유감을 표시하면서 ‘팩트’(사실)에서도 일부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유족 관계자는 일부 수정으로는 애초 바랐던 목적을 이룰 수 없을 것으로 판단해 새 평전을 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첫 평전이 제대로 나온 뒤 여러 다른 시각의 평전들이 나오는 건 문제 없겠지만 처음 것은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저자는 17일 “평전은 공식 기록이 아니며, 세상을 떠난 공인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은 평자의 몫”이라며 “유족 입장에서는 마음이 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관계가 틀린 게 아니라면 다양한 시각의 평가는 문제가 될 수 없으며, 다른 시각의 평전은 또 쓰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안 전 학장은 또 “원래 개인사가 아닌 사회사를 쓰려고 했다”면서 “막판에 유족 몇 분을 만나보긴 했으나 나름대로의 시각으로 쓴 글을 세상에 내놓는 걸로 소임은 다했고 평가는 독자가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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