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30 20:24
수정 : 2006.01.30 20:24
임영방 전국립현대미술관장 "세계적 톱스타가 사라졌다"
미술계 인사들은 백남준이라는 큰 별이 떨어진데 대한 충격을 나타내며 그를 애도했다.
▲임영방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 1992년 백남준의 회갑 기념때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했던 '비디오 때, 비디오 땅'이라는 대규모 전시를 기획했던 임영방(77)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은 "세계적인 톱스타가 사라졌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는 "생활 속의 즐거움과 편리를 제공한 백남준의 예술세계는 피카소나 그 어떤 예술가도 따라잡을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해방 후 백남준씨가 홍콩에 있을 때부터 교우하고 지냈다는 임영방씨는 "5-6년전 뉴욕에서 그를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는 외로운 사람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그가 갔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힌다"고 말했다.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대해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위대한 예술가가 떠난 것이다. 그의 예술은 역사에 남을 것이며 작품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격찬했다.
또 "현대문명을 이루는 과학과 정보매체가 백남준 덕택에 오늘날의 시각 매체문화라는 것으로 탄생한 것"이라며 "그는 예술이 예술로 머무르지 않고 세상과 사회를 발전시킨 원동력이 되도록 만든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미술평론가 이용우씨 = 2000년 '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이라는 책을 펴냈고 '비디오 예술론', '백남준' 등 백남준과 관련된 가장 많은 저술을 낸 미술 평론가 이용우씨는 "한국미술을 국제 무대에 인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라며 애도했다.
광주 비엔날레 초대 전시감독이었으며 현재 뉴욕에 머무르고 있는 그는 "백남준 선생은 비디오라고 하는 독특한 뉴미디어아트를 개척하고 기술을 인간화해 바라본 큰 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해 9-10월께 식당에서 만났을 때 그렇게까지 건강이 나빠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 톤이 상당히 높은 것이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며 "중풍환자에게 추위가 좋지 않은 만큼 10월-4월에는 마이애미에서 보낸 뒤 뉴욕으로 돌아오곤 하셨는데 겨울을 넘기지 못하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백남준씨의 뉴욕 생활에 대해 "한국인들과는 거의 접촉이 없으셨으며 1996년 중풍을 맞으신 후 10년째가 되시면서 점점 쇠잔해지는 모습이셨다"고 전했다.
▲김영순 예술의 전당 전시감독 = 1998년 말 백남준이 교토 프라이즈를 받을 당시 추천위원이었던 김영순 예술의 전당 전시감독은 2000년 구겐하임 미술관 전시를 앞두고 기성체제가 주는 상을 마지 못해 받았던 백남준의 수상 장면을 전했다.
김영순씨는 "시상식에서 부인이 휠체어를 밀고 오는데 싸구려 파란색 점퍼를 입고 천황에게 손짓으로 인사를 했으며 일본어를 잘하면서도 영어로 연설을 했다"며 "어느샌가 연설 도중 바짓단을 둥둥 걷어올린 것을 보고 기성 체제에 대한 선생의 마지막 야유를 읽을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또 "당시 방송사 기자들이 유골을 어디다 묻고 싶냐고 물었더니 '여태까지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본 적 없고 유골이 어디 묻힐까가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는다'고 답하셨다고 전했다.
아울러 "선생님은 '캘리포니아 어딘가에 화장터가 생겼다고 하니 그런데서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껏 서바이벌 게임을 해왔다'고 말하셨다"고 소개했다.
▲김홍희 쌈지미술관장 = 1980년 미국 뉴욕에서 미술사를 공부할 당시 백남준씨를 처음 알게됐다는 김홍희 쌈지미술관장은 1984년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국내에 들어올 당시 교량 역할을 했던 미술인이다.
김홍희 관장은 백남준의 예술세계에 대해 "백남준 선생은 진정한 아방가르드 예술가였다. 일상생활로부터 유리된 예술이 아니라 대중 매체를 통해 예술을 삶으로 전환시킨 작가였다"고 애도했다.
김관장은 1992년 '백남준과 그의 예술'이라는 책을 펴내고 1998년 증보판을 내
백남준씨의 작품세계를 국내에 알리는데 기여했다.
조채희 기자
chaehee@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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