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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01 21:26 수정 : 2006.02.01 21:26

전통 자수의 산수 풍경 등을 콜라주해 새롭게 구성한 써니킴의 아크릴 그림 <흐린 시선>.

재미작가 써니킴·한국화가 김은진 2인전

‘차용’은 2000년대 이후 젊은 미술인들 사이에서 가장 쓸모있는 작업 전략의 하나다. 대중문화 아이콘이나 전통 그림 등에서 이미지를 빌어와 전혀 다른 의미의 작업 소재로 쓰는 것은 진부하기까지한 유행이 되었다.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재미작가 써니킴과 한국화가 김은진씨의 2인전은 그 일례에 속한다. 차용의 전략을 문화적 정체성 혹은 자폐적 시선에서 변주하는 여성작가들의 근작 모음이다. 두 작가는 이민 1.5세대(써니킴), 유학생(김씨)출신이다. 현대미술의 본 무대 미국에서 작가적 정체성이나 이질적 일상을 체험한 그네들이다. 작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젊은 미술인들의 차용 작업들이 어떤 전형으로 흘러가는지를 극단의 감각으로 대변하는 까닭이다.

이민·유학세대 정체성 찾기
이미지 ‘차용’ 통해
내면에 숨은 고독·불안 변용

과거 인삼 등을 인간처럼 형상화했던 김씨의 눈은 2층에 걸린 근작들에서 옷의 독특한 상상력을 좇고있다. 그림 대부분이 옷이나 옷을 걸친 사람·동물 등을 한지 위에 그린 채색화다. 복, 귀, 수 등의 글자 새겨진 전통문양, 루이뷔통 같은 고급 패션 브랜드 무늬를 여러 옷, 심지어 개와 돼지 등의 살갗에도 등장시켰다. 작가는 자기 내면에 숨은 욕망, 고독, 증오 등의 감정을 선명한 원색의 옷 이미지들에다 표출한다. 그럼에도 옷 이미지들은 화려한 유행이나 멋이 아니라 불안감과 밀폐감, 정서적 파국 등으로 뒤덮여있다. 구관조 머리를 하고 식기 쟁반을 든 하녀 옷차림의 여자, 얼굴이 금간 성의 차림이나 이빨을 드러낸 성모 마리아의 그로테스크한 형상 등이 보인다. 두꺼운 잠수복을 입고 꽃머플러를 두른 해녀의 뒷모습, 철갑 해저복 속에 웅크린 작가의 자화상 같은 얼굴 등은 은둔하듯 그려온 작가의 유폐적 상상력을 켜켜이 드러낸다. 작가는 작업 노트에 “깊은 바다의 춥고 어두운 환경은 고독에 처한 환경과 비슷하다”고 썼다.

과 개의 몸통에 가톨릭 성직자의 제례복을 입힌 김은진씨의 채색화 <개가죽과 지팡이>.
또하나 도드라지는 것은 사랑과 희생, 영성과 구원을 상징하는 가톨릭 사제의 성의, 마리아·예수 등의 성상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깨어진 얼굴의 성모상이나 큰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치장한 예수’ ‘이빨을 드러낸 성모상’ 등은 괴기스럽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차용이 풍자 혹은 신성모독의 의미가 아니란 것은 분명하다. 오직 마음에 들거나 치유를 해주는 유효한 이미지로 빌어 쓰고 있을 뿐이다.

1층에 작품을 내건 써니 킴은 낯설게 색칠한 교복 소녀 이미지로 고국 근대문화에 대한 이질적 감성을 표현했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 자수에 표현된 여러 이상적 풍경들을 바탕 삼아 ‘완전한 풍경’으로 지은 멀겋고 중성적인 풍경을 만들었다. 전통자수의 산하, 바위 이미지를 빌어와 콜라주하면서 낯설고 모호한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문양마다 엄격한 상징과 의미가 깃든 전통 그림의 도상학적 질서는 작가의 관심 밖이다. 희멀건 그림들은 자기 의식 속에 깃든 감성의 지도에 따라 재료와 소재를 낙점해 그린 것이다. 보랏빛 화면에 차갑고 경쾌한 연두, 푸른, 분홍빛 띠처럼 표기된 산하와 구름, 바위들, 서양의 고전 장식같은 버드나무, 오리떼들이 이어진다. 그래픽 디자인처럼 깔끔하고 정제된 화면, 균일한 색감이 특징인 자연 풍경을 보고 난 뒤 끝은 진부함으로 남는다. 동서양 전통 현대를 이분법으로 가르며 이미지를 차용하는 빤한 유행을 마냥 답습한다는 느낌이 적지않다. 나른한 화면 위에 아른거리는 전통 자수의 해체된 이미지들은 푸석하고 덧없다.

엄밀히 말해 두 작가들의 작업은 감각의 힘과는 별개로 요즘 일상의 특정 사물, 그리고 전통의 세계 속으로 자폐해 들어가는 여성 작가들의 전형적 흐름을 좀더 명확하게 도두보여줄 뿐이다. 스스로 이미지를 낳고 의미의 살을 덧붙여야하는 인고의 과정이 그들을 기다릴 것이다. 평론가 박영택씨는 “두 사람의 작업은 국내 작가들의 전략적 차용이 이미 포화상태의 한계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고 평했다. 19일까지. (02)2020-205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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