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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14 21:18 수정 : 2006.06.15 00:50

[TV보는남자]

〈상상 플러스〉의 연출자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인상적인 말을 했다. “‘올드앤뉴’를 구성할 때… 패널들이 10대들의 언어를 쓰면서 지배자들의 언어를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의도했다”고 밝혔던 것인데 시끌벅적한 오락 프로그램이 언어의 위계를 공격하려는 정치적 의지를 품고 있구나 싶어 감탄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한 시간 동안 방송을 봐야 기껏 10대들의 표현 하나를 배우게 되는 ‘어른’의 입장에서는 반성보다는 반감이 생길 때가 있다. 약이 오를 때도 있다. 지배적 언어에 익숙한 내가 굳이 10대들의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할까 싶은 것이다. 필요뿐 아니라 가능성도 큰 문제다. 지금부터 의욕을 갖고 늦깎이 학생처럼 매진한다 해도 청소년들의 신생 언어를 익히지 못할 것 같은 걱정이 앞선다.

나는 인터넷 댓글을 자주 읽는 편에 속하는 어른이다.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외계어를 만나더라도 글의 의미를 읽는 데는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읽을 만한 논리적 댓글은 절대다수가 표준 언어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붐업’ ‘붐따’ ‘??오 乃’ 등 몇 가지 단어만 알면 ‘네이버 붐’을 감상하며 얼마든지 낄낄거릴 수 있다. 밤새 십대들과 채팅하거나 상습적으로 문자 메시지를 교환할 게 아니라면 청소년 슬랭을 꿰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십대의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 배우라’는 올드앤뉴의 권고를 무시반, 포기반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십대 청소년보다 서너 배 오래 산 이들이 청소년 말에 통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청소년 말은 그들의 절박한 삶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청소년의 희망과 낙담과 적대감 그리고 오해와 허영 따위가 그들 말의 모양과 의미를 결정한다. 어른들은 그들과는 좀 다른 종류의 허영과 좌절을 겪는다. 자신이 십년 이십년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없다고 믿고 싶은 허영, 유행을 앞서 포착하는 트렌드 세터가 되지는 못할망정 상상력도 감각도 없는 구닥다리로 낙오될 것 같은 공포가 있다. 청소년 말에 눈뜨자마자 써먹어보려고 만용을 부리다가는 낭패보기 싶다. “여기 내 빠순이들이 참 많네 ~” 지난 대선, 보좌관에게서 귀띔을 받았는지 젊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어보려다 두고두고 입에 오르내리는 대통령 후보 아무개도 민망한 실수를 했다. 섣불리 청소년들의 말 몇가지를 건성으로 익혀 젊은 피를 자처하는 어른들의 귀감이 되는 사례라 아니할 수 없다.

청소년과 기성세대가 유례없이 높은 언어 장벽을 사이에 두고 있다는 ‘올드앤뉴’의 전제는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십대 언어는 어른들에게 습득과 활용이 절대 쉽지 않다. ‘올드앤뉴’의 흡인력 중 상당 부분은 두 가지 콤플렉스 덕분이다. 아이들의 세계를 이해해야 마땅하다고 믿는 착한 어른 콤플렉스가 그 중 하나이다. 또 아이들(혹은 트렌드)로부터 ‘왕영은따’(청소년들은 왕따를 이렇게 부른다)가 되지 않을까 하는 공포감도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아직도 내게는 외계어보다는 지면에 박혀 있는 개념과 표현들이 훨씬 재미있고 유익해 보인다.

이영재/웹진 〈컬티즌〉 편집장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 칼럼 ‘TV 보는 남자’는 이영재 웹진 〈컬티즌〉 편집장과 책 〈만화, 쾌락의 급소 찾기〉 등을 쓴 이명석씨가 돌아가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비평을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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