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현정
|
새 음반 낸 지 3개월 반 만에 활동 시작
가수 김현정(29)과 인사동 길에 들어섰다. "저 여기 와본 적 있어요. 붓, 먹, 벼루 등 서예 도구 사러요." 할리데이비슨을 즐겨 타는 '에너자이저', 화려한 '댄스 퀸'으로만 알았다. 정적인 취미도 있을 줄이야. 그는 전통 공예품을 파는 가게를 호기심 있게 둘러봤다. "드문드문 지속적으로 붓을 잡아요.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선지 시간이 오래 흘러도 선생님이 잘한다고 칭찬해주세요. 동양화도 배우고 싶었는데." 한차례 병치레를 하고 나선지 김현정은 핼쑥해지고 차분해졌다. 그의 정적인 취미와 동떨어진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주위 스태프는 눈매가 착해졌다고 해요." 김현정은 5월 댄스 음반을 내기 직전 병상에 누웠다. 식도염에 급성 위궤양이 겹쳐 활동이 불가능했다. 3개월 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이달 초부터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속이 쓰렸어요. 위가 안 좋다고 생각했죠. 내시경 검사를 받았는데 식도염에 신장, 간 기능도 안 좋았어요. 스트레스 수치도 높았고 혈액 순환도 안되고 불면증도 있었죠. 그냥 살아가는 덴 무리가 없지만 방송 활동은 불가능했어요. 걸어다니면 어지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김현정은 스스로를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정신까지 흔들린 게 문제였다"는 것.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스타의 길, 험하고 외로웠던 것일까. 1998년 '그녀와의 이별'로 데뷔한 그는 매년 한 장씩 음반을 내며 수십만 장씩 팔아치웠다. '되돌아온 이별'(2집), '멍'(3집), '떠난 너'(4집), '단칼'(5집), '끝이라면'(6집) 등 히트곡을 줄줄이 쏟아냈다. 고음에서 시원하게 내지르는 샤우팅 창법을 '김현정 창법'이라고도 했다. 2004년 발표한 7집 'B형 남자' 때부터 신생 소속사와 손잡으며 스스로 한 차례 심리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보통 가수가 신생 회사와 일하면 한동안 힘들어요. 주위의 만류도 있었죠. 당시 30억, 50억 투자 제의도 있었지만 모두 거절하고 택했어요. 외부 돈 받으면 뒷감당이 어려울 것 같아서요. 소심하게 천천히 갈 걸 예상하고 있었죠. 'B형 남자' 때부터 '대박' '흥행'에 대한 욕심도 버렸어요." 그는 병상에서 가수로서 미래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한 듯 보였다. 기계적으로 매년 한 장씩 음반을 내고 지상파방송 3사를 돌며 가요 프로그램,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음반을 홍보하고. 그런데 음반 시장은 바닥을 치고. 주위 일부 동료들은 가수로서의 무게감을 벗고 연기자의 길을 택하고. "계속 이 방향으로 살아야 하나, 이정표가 보이지 않더군요. '난 지금 뭘하는 걸까', 헷갈리고 궁금했죠. 언젠가 친구들이 장난삼아 제게 '흘러간 10대 가수'라고 말하더군요. 지금은 설령 하향곡선이 있더라도 굴하지 않고 음반을 내는 것만으로도 전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곱씹고 곱씹어도 김현정의 결론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마음을 다잡고 잘 넘겨야 할 시기라고 생각했던 것. 마음이 앞서 퇴원 후 댄스 연습실에 갔다가 쓰러진 적도 수차례. 복귀 첫 방송 때 9년차 가수가 가사가 생각 안날 정도로 떨렸다고 하면 그 누가 믿으랴. "첫 무대 때 객석 맨 앞줄부터 뒤까지 차지한 팬들이 댄스 음반 타이틀곡 제목인 '굳세어라 현정아'란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어요. 저부터 댄서까지 모두 울어버렸죠. '나오길 잘했구나. 웅크리고 있지 않길 잘했구나'란 생각에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그는 지금 하루 스케줄 두 개를 소화하기도 힘에 부치는 듯했다. 그래도 얼굴엔 미소를 띤다. "절대 놀면 안되요. 얼굴도 붓고 날카로워져요. 자기 관리도 덜하게 되고. 더 기력 찾으면 3개월간 연습하다 아파서 중도 하차했던 춤인 걸스 힙합도 보여줄겁니다." 이은정 기자 mimi@yna.co.kr (서울=연합뉴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