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26 17:59
수정 : 2006.10.26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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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김수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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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잔혹한 출근’서 자식 유괴당한 연기
배우에게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를 연기하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일단 간접경험이라도 해야 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최대한 그럴 듯하게 그 세계를 흉내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간접경험으로도 닿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한다. 바로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이다. 자식을 낳고 부모가 된 후의 부모 연기와 그렇지 않을 때의 연기에는 분명 차이가 느껴진다. 그만큼 부모 연기에는 실제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잔혹한 출근'의 출연을 앞두고 김수로(36)가 직면한 가장 큰 고민 역시 그것이었다. 개봉을 앞둔 현재는 기혼자의 몸이 됐지만(그는 10월1일 결혼했다), 아직 그에게는 자녀가 없다. '잔혹한 출근'은 금쪽 같은 외동딸을 유괴당한 아버지의 이야기(아이러니하게 그 역시 극중에서 누군가의 딸을 유괴하지만). 연기력이 검증된 그일지라도 결코 만만하게 볼 역할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김수로에게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부성애(父性愛)가 뚝뚝 묻어나기 때문. 그렇다면 김수로는 어떤 준비를 했을까. 시사회 후 만난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쌀쌀한 가을 날씨를 단숨에 따뜻하게 만들었다. '흡혈형사 나도열'에서부터 홀로 영화를 끌어갈 수 있는 힘을 보여준 김수로는 블랙코미디 '잔혹한 출근'을 통해 다시 한번 역량을 과시했다. 더불어 이제는 더이상 그를 '코미디 배우'라고만 규정지어서는 안될 것임을 깨닫게 했다.
"자식이 없는데 출연을 앞두고 얼마나 노력을 더 해야 했겠어요. 방법은 조카를 자주 보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두 살짜리 조카가 있는데 용인 죽전에 살아요. 제가 강남구 대치동에 사는데 거의 매일같이 여동생보고 조카를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택시비가 왕복 6만 원인데 단 30분을 보더라도 촬영할 때는 매일 봐야겠더라구요. 예쁜 조카를 봐야 자주 그런 애를 유괴당했을 때의 부모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김수로에게서 나온 대답은 그 자체가 영화였고, 감동이었다. 말이 쉽지 멀리 떨어져 사는 조카를 매일같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란 웬만한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다.
"원래도 조카를 예뻐하는데 그렇게 매일 보니 정이 더 생기더군요. 여동생이 사정이 있어서 못 오는 날이면 삐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날이면 얼른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컬러메일로 전송하라고 했죠. 가장 예쁜 모습을 찍어서 보내라고 했습니다. 조카의 얼굴을 보며 부모의 사랑, 안타까움을 느끼려고 노력했습니다. '어휴 이 녀석이 내 새끼인데…'라며 계속 주문을 걸었어요. 그랬더니 나중에는 조카들이 지네 아빠보다도 저를 더 좋아하더라구요(웃음)."
김수로는 이러한 '눈물겨운' 간접경험을 바탕으로 부단한 훈련을 더해 부모 연기를 완성시켰다.
"경험하지 않은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트레이닝이 절실합니다. 트레이닝을 하지 않으면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을 이번에 철저하게 느꼈어요.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하고 그것을 상상력과 훈련으로 증폭시켜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반복하면 처음에는 10%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다음에는 30%로, 또 그 다음에는 50%로 확대되죠."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절제로 이어졌다. 자식을 유괴당한 부모치고 제 정신인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그는 그렇듯 누구나 할 수 있는 표피적인 추측에서 한발 더 나갔다. 때로는 연기가 더 현실적이게 다가오는 법.
"생각 같아서는 미치고 환장하겠는 심정을 머리를 쥐어뜯고 가슴을 때리며 울부짖는 것으로 표현하고도 싶었죠. 그게 더 진정성이 있어 보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게 나만의 해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또 실제로 딸을 가진 부모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판단했습니다. 또 광기 어린 눈동자나 발산하는 연기는 다른 배우들을 통해 많이 보여진 연기잖아요. 그래서 전 좀 '놓아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온 것 같네요."
12일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때 김수로는 입장하면서 이병헌이나 정우성보다 훨씬 큰 박수를 받았다. 그만큼 그가 대중에게 즐겁고 유쾌하며 친근한 스타로 자리매김한 것. 그러나 그러한 이미지 역시 평소 부단한 노력의 산물임을 이날 그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한번 느꼈다. 그는 스스로 '천재적'이거나 '타고난'이라는 수식어보다 '노력하는' 연기자이길 원한다.
"부산에서의 반응에 너무 놀랐고 감동받았습니다. 제가 신화나 god 인 줄 알았다니까요(웃음). 동시에 뼈를 깎는 고통이 있어도 관객의 사랑에 보답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제가 잘나서 여기까지 왔다고 0.1%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끝이라는 것도 알구요. 지금의 저는 100% 관객과 제 주변의 인간관계 덕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건 겸손도 아닙니다. 실제 그렇게 생각하니까요. 정말 미치도록 열심히 해서 관객에게 보답하고 싶어요."
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잔혹한 출근'을 택했다는 김수로. 그는 노력을 통해 그러한 욕심을 진심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영화의 결과가 어떻든간에 그가 행복해할 수 있는 이유다.
윤고은 기자
pretty@yna.co.kr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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