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가 정이현이 만난 ‘그해 여름’의 이병헌
|
소설가 정이현이 만난 ‘그해 여름’의 이병헌
〈그해 여름〉(감독 조근식)은 사랑이 순수했던 그 시절을 향한 향수에 오로지 기대고 있다. 향수는 기억을 미화하기 마련이다. 대학생 석영(이병헌)과 부모가 월북해 외로운 산골 여자 정인(수애)이 만나는 마을 수내리나 1969년이란 시간도 그렇게 아련하게 탈색됐다. 그 순수의 공간을 배경으로 이루어질 수 없어 더욱 애잔한 첫사랑을 영화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그린다. 그런데 이병헌과 수애는 현실에서 한발 붕 뜬 듯한 향수에 중량감을 준다. 그들을 보노라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사랑은 응당 그래야만 하고 그럴 것만 같아진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배우 이병헌은 철이 들듯 말듯한 청년의 풍부한 감성을 넘치지 않을 만큼만 찰랑찰랑하게 담는다. “또래로서 이병헌이 친근하면서도 완벽한 외피 속엔 어떤 내면이 있을지 궁금했다”는 소설가 정이현(오른쪽)이 지난 20일 그를 만났다. 이날 만남은 정씨가 이병헌의 팬임을 알고 <한겨레>가 주선했다.
|
〈그해 여름〉
|
격정적 첫사랑에 몸을 맡긴 청년과 옛사랑에 미소로 마주서는 노인을 섬세한 결로 창조해냈다 새 영화 〈그해 여름〉은, 〈달콤한 인생〉 뒤 오랜만에 선택한 작품이다. 거기서 그는 20대 초반과 60대 후반을 동시에 연기했다. 생애 처음 찾아온 격정 앞에 몸을 내맡기는 청년과, 옛 사랑의 흔적 앞에 오열 대신 은은한 미소로 마주서는 노인. 다르면서 같은 그 인물을 이병헌은 섬세한 결로 창조해냈다. 청년시절의 연기가 상대적으로 쉬웠던 건 자연인으로서의 이병헌이 그때를 지나왔기 때문일 터다. “연기에 대한 열정이라는 측면에선 20대 때와 지금이 다를 바 없어요. 그래도 그땐 마냥 즐겁기만 했다면 지금은 책임감이 덧입혀졌죠.” 그 책임감에는, 평생 배우로 살아야 하는 운명에 대한 자긍심과 안쓰러움까지 포개어져 있을지 모른다. 대중에게 무방비로 노출되어야 하는 일상이 평화롭기만 하다면 거짓말이다. ‘기계가 아니므로’ 번번이 마음을 다치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안으로 꾹꾹 눌러 삭인다. 마음의 굳은살이 딱딱해질수록 더 건강하게 살려고 노력한다고 말하는 그 남자의 윗입술이, 다짐하듯 조금 떨렸다. 〈그해 여름〉은 ‘여름’이라는 계절에 대한 영화인 동시에, 한 남자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찬란했던 한 순간에 관한 영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인생의 ‘여름들’이 스쳐지나갔다. 또한 그 날들이 진즉에 지나버렸음을 서글프게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병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나의 여름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은데.” 이럴 수가! 조로(早老)가 유행인 시대의 한복판에서, ‘아직 정점에 다다르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이 배우가 진심으로 부럽고 또 미덥다.
마지막으로, 이병헌으로 사는 게 행복한지를 물었다. 이 단순한 질문을 던진 이가 그 전엔 아무도 없었던 걸까. 그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인터뷰하는 사람의 본분도 잊은 채 나는 조마조마해졌다. “행복한 편이에요.” 그가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긴 청춘을 함께 통과한, 오랜 친구의 안위를 확인한 것처럼.
|
소설가 정이현이 만난 ‘그해 여름’의 이병헌
|
정이현/소설가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