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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3.07 18:01 수정 : 2007.03.07 18:01

TV보는 남자

별스러운 프로그램만 골라서 본다고 소문이 난 나이지만, 친구들에게서 가끔 이런 핀잔을 듣는다. “바둑도 봐?” 하긴 나도 그 네모난 판에 까만 돌 하얀 돌 오고가는 돌 놀음에 온종일 빠져 있던 어른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티브이란 게 참 좋아. 세계에서 제일 농구 잘하는 선수들을 보려면 엔비에이(NBA) 중계를 틀면 돼. 세상에서 가장 멋진 축구 경기를 보려면 박지성이 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를 보면 되지. 그런데 지상 최고의 두뇌 게임을 만끽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아? 대한민국 바둑 채널을 하루 종일 보는 거야.”

몇 해 전 일본에서 〈고스트 바둑왕〉이라는 만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제법 잘 빚은 작품이었다.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에게도 새삼 바둑의 재미를 느끼게 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던 나는 가끔 콧구멍으로 새어나오는 헛바람을 참기 어려웠다. 그래, 일본 소년들이고 세계 최강이고, 한국 기사는 어설픈 악역이라 이거지. 20년 전에 브라질 사람들이 월드컵 축구에서 한국이 우승하는 만화를 보면 이런 기분이었을까?

모든 두뇌 게임의 정상에 바둑이 있고, 그 꼭대기에 한국의 기사들이 총천연색 깃발을 휘두르며 옥신각신하고 있다. 예전에도 만만찮았지만 지금의 바둑판은 정말로 흥미 만점이다. 돌부처 이창호가 16년 세도의 조훈현에 이어 십년 권좌를 누릴 때는 정말 바둑의 끝에 이르렀나 싶었다. 하지만 불패소년 이세돌이 맹공에 나서 양강 체제가 되나 싶더니, 최철한, 송태곤과 같은 신예 고수들이 대거 등장해 그야말로 춘추 전국 시대를 이루고 있다. 최강 한국에 맞서 중국과 일본에서도 만만찮은 대항마들이 덤벼들고 있고, 바둑티브이는 이 쟁쟁한 삼국지를 생방송으로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바둑을 보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신문에 나오는 기보나 바둑 사이트의 프로그램으로 모든 수를 재현해볼 수 있다. 그러나 생방송은 바둑판 양쪽에 앉은 신(神)들이 풍겨내는 다채로운 인간의 냄새들을 느끼게 해준다. 조훈현은 쯧쯧 하며 자신을 책망할 때 더 강한 수로 상대를 내쳐버리고, 여걸 루이나이웨이는 맹렬한 싸움을 걸어놓은 뒤 바둑판 위로 귀엽게 머리꼭지를 내밀고, 어느 소녀 기사는 문제의 수를 둔 뒤에는 상대의 표정을 슬쩍 흘겨본다. 기계가 아닌 인간이 두는 바둑은 그래서 더 즐겁다.

요즘 바둑 채널은 고루해지기 싫어서인지 여러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초속기 이벤트로 고수들의 바둑판을 동네 16급의 세계로 떨어뜨리고, 신예 프로들에게 검은 돌과 흰 돌의 구분을 없애 암기만으로 판을 이어가게 하고, ‘영환 도사를 이겨라’며 아마추어들에게 도사 복장의 프로에게 도전할 기회를 준다. 유머가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바둑판과 흑백의 돌만 있어도 기꺼이 도낏자루를 썩힐 사람들은 적지 않다.

이명석/저술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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