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2 17:24
수정 : 2005.05.12 17:24
다섯 빛깔 물들인 ‘절망’
다이(본명 이지선·28)의 첫번째 앨범 <폐곡선>은 영국 그룹 ‘포티스헤드’처럼 ‘일렉트로닉’을 돌덩이같이 두르고 음울함 속으로 침잠한다.
그의 애매모호한 목소리는 자연계의 소리를 뒤틀거나 버린 연주를 타고 어떤 음에도 안착하지 않은 채 떠돈다. “뒤집힌 시계 멈춰 섰네, 울고 있는 아이의 한숨”(폐곡선), “왜 알고 있던 걸까, 왜 되돌아갈 시간, 왜 지워질 거란 걸”(홈식)…. 논리적 연결을 버린 노랫말은 툭툭 끊어져 인상만 남긴다.
그래서 노랫말을 쓴 다이가 검은 옷으로 휘감고 심각한 눈초리로 허공을 쏘아보는 사람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런데 인터뷰 자리에 나타난 그는 은빛 귀고리를 찰랑대며 붉은 재킷을 걸친 20대였다. “그냥 우울한 걸 좋아해요. 꽉 막혀 닫혀 있는데 헤어나지 못하는 느낌이 자주 들어요. 마음대로 할 수 없고 뭔가 절 물고 늘어지는 것 같아요.”
<폐곡선>을 채운 5곡의 인상은 비슷한데 꼭 같지는 않다. 물에 뜬 석유의 검푸른 빛깔이 빛의 각도에 따라 무지개 색감을 띄듯 <폐곡선>의 절망은 오묘하다. 이런 빛깔을 보탠 건 ‘삐삐밴드’의 강기영(달파란), ‘어어부’의 장영규, ‘도마뱀’ 맴버였던 방준석, ‘유앤미블루’에서 활동했던 이병훈이 참여하는 ‘복숭아프레센트’다. ‘복숭아…’는 영화 <해안선> <…ing> 등의 음악을 맡다가 2003년엔 옛 노래를 현대적으로 바꾼 한영애의 <비하인드 더 타임>을 연주·편곡하기도 했다.
타이틀곡인 ‘폐곡선’(장영규 작곡)에서는 지하로 통하는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피아노가 둔중한 발걸음을 천천히 내딛는다. 힘 없이 굴러가는 물병 소리 등이 몽롱하면서도 예리하게 얽힌다. 이에 비해 ‘쉬 스마일스’(강기영)는 좀더 밝고 영롱하다. ‘홈식’(방준석)은 베이스와 템버린이 놓는 박자의 힘이 비교적 세다. 귀에 가장 익숙한 ‘윈드번’(이병훈)은 내지르는 다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다.
“‘쉬 스마일스’는 감정 없이, ‘폐곡선’은 쓸쓸하게 불러 보라는 거예요. 그게 어떻게 하라는 건지…. 스스로 알아서 노래해야 하니까 힘 들더라고요. ‘오빠’들이 작곡을 한두곡씩 맡았는데 한곡 나오면 또 몇 달 있다가 하나 나오고 그런 식이었어요. 이러다 서른 넘기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죠.(하하)”
그렇다고 “음악으로 먹고 살 생각 없다”는 그가 그리 초조해하지는 않았을 듯하다. 초조함은 20대 초반에 이미 다 써버렸다. “기획사 계약에 묶여 5~6년 허비해 버렸어요. 아르앤비 솔로다 댄스다 기획사에서 마음대로 만들어서 신물 났어요.” 요즘 그는 서울 홍대 앞 ‘애비수’라는 옷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친구들이 아직도 그렇게 사냐고 그래요. 그래도 그냥 좋아요. 이번 앨범 표지 사진 보셨어요? 눈썹도 없이 기괴하잖아요. 그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제가 그렇게 스타일을 잡은 거예요.”
“재미있다”는 말을 반복하는 그는 ‘윈드번’이란 곡에서 “복사되는 하루… 타버린 쓰레기와 나 시험대 위에 올려져 있어, 하나씩 또 하나씩 사라져”라고 외친다. 하지만 그가 지은 이름 ‘다이’는 ‘죽다’(die)가 아니라 ‘물들이다’(dye)라는 뜻이다. 그의 노랫말은 암울하지만 희망의 끝을 선고하지 않는다. ‘폐곡선’에 갇힌 듯한 절망도 가지고 놀기 나름이다.
글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복숭아프레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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