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난 17일 밤 서울 홍대앞 클럽 엠아이(M.I)에서 디제이 티케이(TK)가 일렉트로니카 음악을 틀고 있다.
|
2005년 6월의 어느 금요일 밤 서울 홍대앞 클럽 엠아이(M.I·사진). 현란한 조명 아래 20평 남짓한 공간을 빼곡 채운 수십명의 청춘남녀들이 일렉트로니카(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전자음악)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든다. 그런데 일행끼리 마주보거나 둥그렇게 모여 춤추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모두들 앞을 바라보며 춤을 춘다. 이들의 눈길이 향하는 중앙무대 한가운데는 디제이(DJ)가 있다. 커다란 헤드폰을 머리에 쓴 디제이는 엘피(LP)나 시디(CD)를 바꿔가며 음악을 트는 데 집중할 뿐 별다른 ‘액션’은 없다. 70∼80년대 음악다방 멘트 날리며 신청곡 틀어줘
90년대 중반 믹싱·스크래치등 기술 적용 음악 ‘창조자’ 영역 진입
홍대앞 클럽들선 스타 디제이도 탄생 신기한 건 곡과 곡 사이에 틈새가 거의 없다는 점. 하나의 곡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그 안에서 음악 분위기가 시시때때로 변해간다. 곡과 곡을 절묘하게 뒤섞으면서 음악을 바꾸는 ‘믹싱’ 때문이다. 디제이의 작은 손놀림으로 음악이 바뀌는 순간 그를 바라보던 이들의 입에서는 탄성이 새어나오고 몸놀림은 더욱 격렬해진다. 이곳은 ‘디제이 엉클(Unkle)’로 통하는 유승렬(49)씨가 지난 95년 문을 열어 10년째 운영해온 클럽이다. 유씨는 일주일에 한번씩 직접 디제이로 나선다. 1992년 어느 토요일 밤 서울 서교호텔 나이트클럽 지지큐(ZZQ). 당시 최고의 주가를 날리던 댄스그룹 투언리미티드의 ‘트와일라이트 존’이 흘러나오자 군중들이 일제히 손을 치켜들어 좌우로 흔들기 시작한다. 디제이 박스에 있던 유씨는 다른 엘피를 턴테이블에 걸고 믹싱 준비를 한다. 당시 디제이들 사이에서 믹싱은 이미 일반적이 됐지만, 80년대 중반만 해도 흔하지 않은 기술이었다. 83년 서울 종로에 자리잡은 나이트클럽 크리스탈에 우연히 놀러간 유씨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영국과 홍콩에서 온 디제이들이 믹싱하는 걸 처음 듣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한 곡이 끝난 뒤 다음 곡을 틀면서 중간에 멘트를 하거나 가벼운 춤을 추는 ‘액션’ 디제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리스탈에 보조 디제이로 들어간 유씨는 1년만에 비밀을 알아냈다. 비결은 재생 속도를 조절하는 버튼이 달린 턴테이블에 있었다. 그는 두 곡의 속도를 똑같이 맞춰 믹싱하는 기술을 배웠다. 1982년 서울 영등포에 자리잡은 음악다방 돌체. 유씨가 디제이석에 앉아 솔·펑크 음악을 튼다. 돌체는 인근의 상록수다방, 대학다방 등과 함께 이 일대 3대 음악다방으로 꼽혔다. 다방별로 고유색깔도 뚜렷해, 돌체는 흑인음악, 상록수는 프로그레시브, 대학다방은 록 음악을 주로 틀었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 사이에는 음악다방뿐 아니라 학사주점·분식집 등에도 디제이 박스가 있었다. 긴 뒷머리를 치렁거리며 낮게 깐 목소리로 “저쪽 예쁜 여학생에게 떡볶이 사리 보너스요~!” 따위의 멘트를 날리는 ‘오빠’ 디제이부터 우스개소리와 퀴즈 등으로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개그’ 디제이까지 각양각색이었다.
“디제이=아티스트?!” 미국에서 디제이가 아티스트로 인식되기 시작한 건 70년대 디제이 쿨 허크가 믹싱을 하며 초기 힙합을 시작하면서부터. 80년대에는 스크래치 등 디제이 기술들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디제이 프랭키 너클스는 하우스 음악을 탄생시켰다. 90년대 들어선 1만~2만명이 참가하는 대형 파티를 이끄는 스타 디제이들이 미국·유럽에서 연이어 등장했으며, 90년대 말 미국·일본에서는 기타보다 턴테이블 판매량이 많을 정도로 디제이의 인기는 높이 치솟았다. 세계적인 디제이의 인기는 국내에서도 높아, 영국 출신의 디제이 피트 통과 일본 출신의 디제이 크러시는 지난해 인기리에 내한공연을 벌이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90년대 중반 이후에야 디제이를 아티스트로 보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홍대앞 클럽들이 하나둘 생기면서 힙합·테크노·하우스 등을 나름의 철학을 갖고 트는 디제이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삐삐밴드 출신의 디제이 달파란(강기영), 디제이 렉스, 디제이 솔스케이프 등 스타 디제이도 탄생했다. 일부 디제이들은 다른 가수의 앨범과 공연에 세션으로 참여하고, 어떤 디제이는 자신의 앨범을 내기도 했다. 다른 앨범을 프로듀싱하거나 영화음악을 만들기도 한다. “디제이여, 주가를 높여라!” 70년대 말 미군클럽 디제이부터 시작해 80년대 초 음악다방, 80~90년대 나이트클럽, 90년대 중반 이후 홍대앞 클럽 디제이로 활동해오면서 디제이의 변화상을 맨앞에서 몸소 겪어온 유승렬씨는 “디제이의 실제 모습이 계속 변해왔음에도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뒤따르지는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극히 일부를 빼고는 클럽에 전속된 디제이조차도 월수입 100만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어서 직업으로 삼기는 쉽지 않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런 대우는 디제이들 스스로 자초한 면이 있다는 지적도 있다. 5명의 디제이가 소속된 힙합레이블 마스터플랜의 이종현 대표는 “디제이의 생명은 얼마나 많은 음원을, 가능하면 엘피로 구해 가지고 있느냐인데, 요즘 디제이들은 인터넷으로 내려받은 음악을 공시디에 구워서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며 “디제이 스스로가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린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믹싱·스크래치 등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만의 풍부한 음원을 모으는 것(디깅)이야말로 디제이가 반드시 갖춰야할 덕목”이라며 “스스로 가치를 높여 디제이의 위상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강재훈 기자 khan@hani.co.kr
“디제이 공연 예술로 만들고 싶다” ‘신세대’ 디제이 선두주자 솔스케이프
|
||||
힙합·디제이 문화 소비적 시각 싫어 “엘피에는 시디가 기록할 수 없는 음역대까지 모두 담기거든요. 비록 인간의 가청영역을 벗어나는 소리지만, 심리적인 감흥상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그래서인지 미국·유럽·일본에서는 엘피 생산량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라더군요. 요즘 국내에선 엘피가 거의 나오지 않아 수입음반을 구하느라 애를 먹고 있지만, 그래도 시디보다는 엘피에 정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어요. 요즘은 시디나 컴퓨터로 디제이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엘피가 제일 편해요.” 이제는 이 바닥을 대표하는 디제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은 그는 “디제이에게 가장 중요한 건 무엇보다도 음악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스크래치·믹싱 등 기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어떤 곡을 골라 트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음악과 대중을 연결하는 게 디제이의 역할이에요. 그런 면에서 우리들도 신당동 떡볶이집이나 국군방송 디제이와 기본적으로 같은 셈이죠. 하지만 그 안에서도 창조성이 중요합니다. 나이트클럽에서처럼 대중의 입맛에만 맞춰선 안됩니다. 디제이가 직접 찾아내 대중에게 전파해야 할 음악과 실제 대중이 좋아하는 음악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게 디제이의 능력이죠.” 그가 디제이에 대한 존재감을 처음으로 느낀 건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본 그래미시상식 공연에서였다. 재즈 피아니스트 허비 행콕과 협연하는 디제이의 모습에 단번에 매료된 그는 “디제이가 그저 음악만 트는 사람이 아니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고 한다. 음악을 좋아하신 부모님 덕에 아주 어릴 때부터 솔·재즈 음악을 들으며 자란 그는 이후 힙합도 찾아 듣기 시작했다. 디제이 기술을 홀로 익힌 그는 1998년 홍대 앞에 힙합클럽 마스터플랜이 생기면서부터 그곳에서 디제이 공연을 시작했다. 그를 따르는 팬들도 제법 생겼고, 지난 2001년에는 뜻맞는 디제이들과 함께 성황리에 파티를 직접 치르기도 했다. 그가 낸 2장의 앨범은 모두 1만장 이상씩 팔려나갔다. 최근에는 힙합그룹 아이에프(IF)의 데뷔앨범을 프로듀싱하고, 영화 <태풍태양> 음악작업도 했다. 가수 윤종신 앨범 가운데서도 한 곡을 프로듀싱했다. 이제는 음악 프로듀서에서 다시 디제이의 자리로 돌아와 대형 파티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힙합과 디제이 문화가 너무 화려하고 소비적으로만 비쳐지는 게 싫다고 말한다. 그래서 디제이 공연을 하나의 예술로 만들고픈 꿈을 가지고 있단다. “음악과 영상을 하나로 결합시켜 미디어 아트로 승화시키고 싶어요. 그래서 클럽이 아닌 전시공간으로 당당히 가져가고 싶기도 하고요. 디제이만이 해낼 수 있는 영역을 개척해 국내에서도 당당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하는 날이 왔으면 해요.” 글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 |
||||||||||||
![]() |
디제이 세계 용어 정리
|
![]() |
||||||||||
![]() |
‘화려한 부활’ 꿈꾸며 오늘은 웬지∼ 아직도 자리 지키는 ‘음악다방’ 디제이
|
||||
1960년대에서 80년대 말까지 인기를 누렸던 음악다방·감상실의 디제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이른바 ‘다운타운’ 디제이들은 1960년대 초 최동욱씨를 시작으로 라디오 방송 쪽으로 진출했다. 전대윤 예당엔터테인먼트 사장처럼 음반제작·기획사 쪽으로 길을 낸 경우도 있다. 음악다방·감상실은 대중음악계 전반으로 향해 열린 문이었다. 하지만 가정에 오디오가 들어오면서 휘청거리던 음악다방은 1990년대 들어 노래방의 공격에 하나둘 사라져갔다. 이 끝물을 탔던 디제이들은 이직하거나, 일산·미아리 등에 있는 라이브 카페로 옮겨 앉거나, 돈이 되건 안 되건 고집스럽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옛 방식 그대로=“덥다 덥다, 7080 엘피로 더위를 식혀봅시다. 다니엘 분의 ‘뷰티플 선데이’입니다” 지난 19일 인천 계양구 작전동 ‘비땅’의 뮤직박스 안에서 청재킷을 걸친 단발머리 장민욱(49·사진)씨는 목소리를 한껏 내리 깔았다. 이미자씨의 <스테레오 힛트쏭> 앨범부터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의 <마지막 축제>까지 엘피 3만5천여장 가운데 아바의 ‘댄싱퀸’을 재빨리 찾아 턴테이블에 올렸다. 뮤직박스를 떠날 수 없는 건 그의 청춘이 숨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976년 서울 구로동 동은다방에서 시작해 전성기엔 노량진 학원가의 ‘영스타’, 신촌의 ‘빌보드’ 강남의 ‘봄삐’ 등 하루에도 3~4군데를 순회했다. “디제이의 역할은 음악의 맛을 보태주는 거죠. 제가 멍청해서 그런지 몰라도 소중한 추억의 공간인 음악다방을 되살리고 싶어요.” 하지만 이렇게 엘피와 디제이를 두고 운영하는 곳은 요즘 거의 찾기 어렵다. 다만 인천 송도에 이달 안 ‘디제이 리멤버’라는 곳이 문을 열 예정이라고 한다. 비땅 (032)554-7080. 음악을 나눌 곳이라면 어디나=“검은 가죽 가방을 찾습니다.” 밤 12시께 서울 동대문운동장 근처 쇼핑몰 ‘뉴존’ 방송실에서 디제이 이진호(43)씨의 목소리가 울렸다. 20여년 디제이 생활을 한 그는 이곳에서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6시까지 보낸다. “새벽 2시30분까지는 안내방송을 주로 해요. 그 뒤엔 신청곡도 받고 멘트도 하죠.” 이에 앞서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는 일산에 있는 라이브카페 ‘이종환의 쉘브르’에서 음향엔지니어, 엠시 그리고 무대와 무대 사이 시간에는 디제이 역할까지 한다. “가능성만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좋은 음악을 공유하는 공간을 갖고 싶어요.” 아나운서 황인용씨가 지난해 파주 헤이리에 문을 연 ‘카메라타’(031-957-3369)처럼 좋은 음향시설과 앨범을 갖추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 그가 그리는 ‘꿈의 공간’이다. 글·사진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