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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위부터 이소라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 양희은·송승환의 <여성시대>, <극동 50년> 녹음 모습. 한국방송, 문화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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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과 추억 오늘도 배달합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41살
‘별이 빛나는 밤에’ 35살
젊은층 감수성 건드리며 추억 차곡차곡
‘여성시대’ ‘…안녕하세요” 일상속 얘기 편지쇼로
중장년층 힘든어깨 감싸안아 첨단 영상 매체들이 판치는 21세기에 라디오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마 라디오는 이렇게 답할지 모른다. “신문 걱정이나 해!” 1927년 경성방송국 본 방송이 시작된 지 78년, 1965년 첫 에프엠 전파(89.1㎒)가 한국의 공중을 가로지른 지 40년이 지나는 동안 라디오는 끄떡없었다. 60년대 한국에 처음 텔레비전이 등장했을 때 ‘라디오 고사론’이 돌았고,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하던 70년대말~80년대초엔 외국에서도 ‘비디오가 라디오 스타를 죽인다’는 노래까지 나왔다. 그 위기를 다 넘기더니 피시통신, 인터넷 시대를 맞아선 차가운 디지털 통신을, 그 속도는 살리되 따듯한 사람의 목소리로 통역하면서 자기 품으로 끌어들여 21세기를 돌파하고 있다. 그들의 구체적인 생존전략이 라디오 장수 프로그램들에 녹아있을 터. 색다른 자극을 주느라 분주한 텔레비전이 줄 수 없는 휴식과 추억을 수십년씩 쌓아온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들을 꼽아봤다. 시그널 음악만으로 마음 편하게 만들어 주는 오랜 라디오 친구들. 그 맏형은 한국방송 해피에프엠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이다. 1964년 5월9일 라디오서울(RSB)에서 첫 전파를 타고 동양방송(TBC)를 거쳐 지금까지 흘러왔다. 이성화 아나운서를 시작으로 진행자만 70년대 양희은·서유석·황인용, 80년대 송승환·배한성·전영록·최수종·하희라, 90년대 변진섭·손무현·김정은 등 30여명이 거쳐 갔다. 지금은 모델 이소라씨가 마이크를 잡고 있다. 변하지 않는 건 시작을 알리는 음악, 폴 모리아의 ‘시바의 여왕’ 이다. 이종만 선임피디는 “이 곡이 음울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3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는 듣기만 해도 추억을 떠올릴 만큼 익숙한 것이기 때문에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음악평론가, 청취자 등이 함께 선곡한 40주년 기념 음반을 내놓기도 했던 이 프로그램은 하루 동안 지친 청취자의 어깨를 감싸안는, ‘세월을 잊은 그대’다. 이에 못지 않게 청소년들과 밤마다 소곤거려온 프로그램이 문화방송 에프엠포유의 <별이 빛나는 밤에>다. 1969년 3월 시작한 이 프로그램을 오남열, 차인태, 서세원, 이종환, 이문세, 이적, 이휘재, 박광현 등이 빛냈다. 그 가운데 전성기를 굳이 기필코 꼽아야 한다면,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1984~95년이 될 것이다. ‘별밤 가족’이란 낱말이 드러내듯 이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큰 몫을 한 건 ‘별밤 가족 마을’이라는 청소년 캠프와, ‘잼콘서트’, ‘정동 공개방송’이었다. 이문세씨는 “2박3일 정도 용평이나 양평에서 우리만의 공화국을 만들었던 캠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잔디밭에 앉아 영화도 보고, 청소년들이 좋아하던 연예인들의 공연도 함께 즐겼다”고 말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를 반영해 디카, 문자 등을 이용한 꼭지들이 들어섰지만 장기자랑하는 마당인 ‘별밤 뽐내기’와 프랑크 포르셀의 <메르시 쉐리>라는 시그널 음악은 그대로다. 이 프로그램들이 주로 젊은층의 감수성을 건드렸다면, 1975년 <임국희의 여성살롱>으로 시작한 문화방송 표준에프엠의 <여성시대>는 그 윗 세대의 벗이 돼 줬다. 비슷하게 편지쇼를 선보인 동양방송의 <황인용 강부자의 안녕하세요>가 추월해가자 1988년 이종환씨를 진행자로 내세워 프로그램 이름을 바꾼 것이다. <임국희…>의 연출을 맡았던 김일수 아리랑TV본부장은 “이종환씨가 온 뒤 성생활 등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청취율이 올랐다”고 말했다. 이종환씨 이후엔 엠시를 두명을 내세웠고 이효춘·봉두완, 정한용·손숙 등이 거쳐 갔다. 연출을 맡았던 신권철 부장은 “아이엠에프 터지기 직전인 1996년 겨울부터 청취자들 편지에 ‘가내 공업을 하는데 수금이 안 된다’는 등 막막한 분위기가 묻어났다”며 “1997년 봄께에는 경제 분석 등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프로그램 내용이 바뀌기도 했다”고 말했다.
말로 기운을 북돋우기보다는 노래 부를 수 있는 판을 제공해 흥을 돋구는 프로그램도 있다. 1991년 시작해 지난해 5천회를 맞은 한국방송2라디오 해피에프엠 <이호섭 임수민의 희망가요>다. 최초로 아마추어 전화노래자랑 꼭지를 마련한 이 프로그램에서 지난해까지만 계산해도 2만명이 훌쩍 넘는 사람들이 노래솜씨를 뽐냈다. 하루에 6사람씩 참여하는 노래자랑에서 좋은 점수를 받으면 주장원전, 월장원전, 기장원전을 거쳐 결선무대에까지 오를 수 있다. 건반·기타·베이스·색소폰을 갖춘 4인조 전속밴드가 빵빵하게 반주해주고 작곡가 6명이 꼼꼼하게 평가도 해주니 폼 잡고 노래 부를 맛이 나는 프로그램이다. 문제는 그 맛에 중독된 사람이 꽤 많다는 점이다. 박명규 피디는 “한이 맺힌 듯 이름을 바꿔가며 여러번 출연하는 사람들이 있어 이들을 골라내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며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엔 중복 출연을 고발하는 전화들이 잇따라 걸려온다”고 말했다. 문화방송 표준에프엠 <격동50년>도 빼놓을 수 없는데, 라디오드라마나 다큐멘터리가 끝물이던 1988년 후발주자로 시작해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이영신씨부터 현재 이영미씨까지 여러 작가들이 흥미진진하게 사실을 재구성해왔다. 해설을 맡은 김종성씨는 변치 않고 중심을 잡아주고 있다. 처음 이 프로그램을 맡았던 정수열 엠비시프로덕션 이사는 “한번에 성우 10~15명이 출연하는데 이들에 적당한 배역을 맡기는 것도 힘들었다”며 “자료가 충분하지 않은 탓에 전라도 사람에게 경상도 인물역을 줘 어색하게 돼 버린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성우들의 열의도 대단했다고 한다. 에피소드가 시간순으로 진행되는 게 아니어서 배역이 비정기적으로 떨어지기 일쑤였는데도 역을 맡기면 언제든 달려오는 성우들이 있었다. 이런 열의 덕에 이 프로그램은 여전히 중장년층의 귀와 호기심을 붙들어 두고 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한국방송 문화방송 에스비에스 제공
청취자와 같이 호흡하며 ‘도전과 응전’ 라디오의 생존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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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이 주로 듣는 프로그램들은 특히 인터넷, 핸드폰 문자 서비스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위로와 소통의 기능을 살리고 있다. 에스비에스 파워에프엠 ‘장근석의 영스트리트’. 사진 에스비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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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용 폭증과 꽉 막힌 교통은 ‘청취자의 광맥’이 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운이 다는 아니었다. 프로그램 포맷을 바꾸고 새로운 기술을 포섭하는 라디오의 생존전략은 세월만큼 노회했다. 피시통신과 인터넷의 쌍방향성과 핸드폰의 속도를 받아들여 자신의 주무기를 달련해왔다. 더 따뜻하게 위로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 공감하며, 더 빠르게 정보를 전달해 온 것이다. 텔레비전의 공격과 피시통신·인터넷 위세에
라디오 살아남을까 걱정스럽다고?
“위기는 기회다” 그들의 강점 포섭해 더 따뜻하게 위로하고
더 가까이 다가오고 더 빠르게 정보 전하며
라·디·오는 달려오고 있다 강적, 텔레비전=1960년대까지는 라디오 천하였다. 한점 먹구름을 드리운 건 1962년 한국방송 텔레비전 정규방송의 시작이었다. 그때만 해도 ‘한점’이었다. 텔레비전 수상기가 있는 집이 ‘한줌’인 덕이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라디오 드라마는 막강했다. 고 유기현의 구성진 목소리로 시작하는 <전설따라 삼천리>(66년~78년)에 남녀노소는 귀를 쫑긋 세웠다. <태권동자 마루치>(74년~77년) 등 어린이 드라마도 인기 만점. <법창야화>(74년~80년), 김수현 작가의 1969년 데뷔 작품인 <저 눈밭에 사슴이>, 반공극 <김삿갓 북한 방랑기> 등도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들이다. 김일수 아리랑TV 본부장은 그때를 회고하며 “하루에 한 채널에서 5편씩 드라마가 방송됐고 재방송도 있었다”고 말했다. 불안한 호시절은 잠시. 텔레비전의 공격은 가히 괴멸적이었다. 1970년엔 37만9564대였던 게 77년에 380만4535대로 10배 껑충 뛰었다. 그리고 1980년 시험방송을 시작으로 ‘컬러텔레비전’ 필살기에 라디오드라마는 하나둘씩 명을 다했다. 그렇다고 죽을 날 받아놓고 있을 라디오가 아니다. 내공 만만치 않은 디제이들의 힘을 빌어음악방송들을 특화해 나갔다. 최동욱의 <탑튠 쇼>(1964년)부터 시작한 팝 프로그램은 1970년대 ‘세르네이드 투 섬머타임’ 시그널 음악으로 젊은 이들의 가슴 뛰게 했던 <박원웅과 함께>(1973년~1992년), 1980년대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황인용의 <영팝스>까지 뻗어나갔다. 박원웅씨는 “엽서들이 하도 예쁘고 사연도 기가 막혀 차마 버리지 못하고 모아뒀다 전시회도 열었다”라며 그때 분위기를 전했다. 여기에 청소년의 애환을 달래주던 프로그램들이 한몫 거들었다. <별이 빛나는 밤에(별밤)>(1969년) <0시의 다이얼> <밤을 잊은 그대에게>(1964년)는 청춘의 밤을 지배한 트로이카였다. 이어 라디오는 청취자의 일상 속으로 돌진해 든든한 진지를 만들었다. 편지쇼의 시작을 알린 <임국희의 여성살롱>(1975년)은 1988년 <여성시대>로 이어졌다. <임국희…>를 연출했던 김일수 문화방송 본부장은 이렇게 말한다. “주부들의 고통, 즐거움을 엽서보다 넉넉하게 편지로 받아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는데 호응이 뜨거웠어요. 곧 <황인용 강부자의 안녕하세요>가 비슷한 형식으로 따라붙었는데 강부자씨가 눈물이 많은 바람에 청취율이 역전되기도 했죠.” 안 무섭다, 피시통신=라디오는 되레 피시통신이 지닌 실시간 소통능력을 접수하더니 거기에 사람의 체온을 입혔다. 예를 들어 <에스비에스 피시통신>(1994년)의 진행자 이기성씨는 채팅하며 청취자와 학교, 첫사랑 등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 프로그램을 연출한 김국은 에스비에스 라디오 시피는 “80명만 채팅방에 들어올 수 있다보니 한 시간 전에 미리 자리를 차지하는 접속자도 있었다”며 “채팅하다 ‘번개’를 쳐 방송 뒤에 함께 놀기도 하고, 접속한 사람들끼리 마음이 맞아 나중에 결혼한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반갑다, 인터넷=덕분에 라디오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청취자들과 온라인 공동체까지 꾸려갈 바탕을 얻었다. 인터넷은 라디오의 속보성이라는 힘에도 강력한 에너지를 보탰다. 2000년 2월 문을 연 인터넷뉴스 <오마이뉴스>는 곧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고려대 앞 사건’ 보도로 대박을 터뜨렸다. 같은해 10월23일 문화방송 표준에프엠 <손석희의 시선집중>의 첫 초대손님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오현오 <오마이뉴스> 대표였다. 또 “누구나 리포터가 될 수 있다”고 내걸고 ‘인디리포터’를 도입했다. 감이 오지 않나? 그 프로그램을 만든 정찬형 문화방송 라디오본부장은 “인터넷 뉴스가 아무리 빨라도 전화로 불러준 뒤 정리해 올려야 한다”며 “이런 취재 시스템을 받아들이되 바로 라디오로 연결하면 더 빨리 전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인터넷과 핸드폰, 디카 등 새로운 매체의 ‘스폰지’는 청소년 프로그램들이다. 문화방송 에프엠포유 <옥주현의 별이 빛나는 밤에>의 이한재 피디는 “‘맞아 맞아 베스트’ 꼭지 등에서 문자를 이용하는데 모두 위무와 소통이라는 라디오의 기능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갈수록 더 많은 정보를 밀어넣는 사회에서 라디오는 감정을 나누고 쉴 수 있는 공간이 돼 주기 때문에 매력을 잃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방송 쿨에프엠 <최강희의 볼륨을 높여라>의 신원섭 피디도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등 라디오 프로그램이 커뮤니티 성격을 갖게 됐다”고 거들었다. 김소민 기자 prettyso@hani.co.kr 사진 한국방송, 문화방송, 에스비에스 제공
“쎈 사람들과 공동진행…대단한 공부였죠” 10년째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지키는 최유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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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타가 공인하는 라디오의 강자는 문화방송이다. 그 중에도 단연 선두 주자는 <전유성 최유라의 지금은 라디오 시대>. 지난달 벌인 청취율 조사(현대리서치)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10년째 매일 오후 4시면 어김없이 애청자들을 찾아온 최유라(38)씨의 힘이 큰 구실을 했을 터다. 영화 데뷔작인 <수탉>보다 <라디오 시대>의 진행자로 더 잘 알려진 그를 12일 오후 문화방송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만났다. 역시 라디오의 힘은 입담, 방송 직전까지도 ‘화수분’이었다. “사명감 같은 게 있어요. 라디오에 대한 의식이나 고민이 없는 사람들이 라디오를 하고 있으니, 라디오가 퇴색하고 있어요. 라디오를 재정비하고 다시 세워나갈 사명이 저한테 있다는 거죠.” 그는 영화배우로 데뷔했지만, 22살부터 지금껏 대부분의 활동을 라디오에서 해왔다. 그만큼 많이 알고 애정도 깊다. 인터뷰 내내 “그때가 그립다”고 되뇌는 심정은 라디오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89년 아직 대학생이던 시절, 라디오 심야프로그램인 <깊은 밤 짧은 얘기>가 시작이었다. 당시 이문세씨가 진행하던 <별이 빛나는 밤에>에 말손님으로 나왔다가 담당 피디의 “디제이로 일해보라”는 제안을 덥썩 받았다. <깊은 밤…>에서 애띤 목소리로 “사랑해요 여러분”하던 인사말은 장안에 화제가 됐었다. 아무리 ‘하이틴’ 프로였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러다 91년 주병진·노사연씨가 진행하던 <100분쇼>를 이어받았다. 이게 95년 <라디오 시대>로 이름을 바꿔 지금까지 내려왔다. 3개의 프로그램이지만 지내온 세월이 16년이다. 그만큼 많은 파트너를 만났다. <깊은 밤…>에서 정재환·강남길씨를 만났고, <100분쇼>는 서세원씨와 함께 시작했다. 이어 황인용씨가 옆 자리에 앉았고, <라디오 시대>로 바뀐 뒤엔 이종환씨를 거쳐 지금의 전유성씨가 올해로 2년째 공동 진행자다. 내로라하는 이들이다. “‘쎈 사람들’ 하고만 했어요. 옆 스튜디오엔 김기덕, 박원홍 이런 사람들이 있었으니 정말 대단한 공부였죠.” 긴 세월의 ‘대단한 공부’ 덕에, 그는 ‘편지를 가장 잘 읽는’ 진행자로 꼽힌다. 비결? 아직도 <깊은 밤…> 시절의 편지와 포스터가 집에 쌓여있단다. “공부하는 심정으로 가방 메고 다니면서 라디오를 했었죠. 그때 편지들을 가져다가 집에서 꼬박꼬박 읽고 예쁜 편지들은 모아뒀죠. 그때 연습이 된 것 같아요.” 그러나 시대는 쉴새없이 바뀐다. 디엠비 등 뉴미디어가 또 다시 라디오의 존재를 위협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의연했다. “말은 몸으로 느끼거든요. 습관 같은 거죠. 애청자분들은 듣지 말래도, 불평하면서도 들어주신답니다.” 김진철 기자 nowher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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