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14 00:52
수정 : 2005.07.14 16:33
박현정의 TV속으로
드라마에 재벌 2세들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비평가들뿐 아니라 시청자들 역시 반감이 많다. 하지만 필자는 재벌 2세가 등장하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에 <똑바로 살아라>란 시트콤에서, 극중 노주현이 아들 노형욱과 드라마를 보다가 “세상에 재벌이 몇 명이나 된다고 저렇게 재벌 2세가 자주 나오냐”라고 불평하자, 노형욱이 “에이, 월급쟁이 둘이 만나 월급 타서 적금 넣고 또 월급 타서 적금 넣는 얘기만 나오면 재미없잖아요?”라고 대꾸하는 대목이 있었다. 물론, 보통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그런 드라마가 주는 재미도 당연히 클뿐더러, 그런 소재를 가진 작품들이 대체로 작품성도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로 우리들에겐,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초미남 초미녀라거나 재벌 2세 같은 희귀한 인간들이 등장해서 “얼마면 되겠어!” 따위, 사랑 말곤 배째라 식의 대사들을 남발하는 오로지 러브의, 러브를 위한, 러브에 의한 드라마를 즐기고 싶은 욕망이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사실 세기의 걸작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도, 재벌 2세와 미남미녀와 귀족이 등장하지 않는가(물론 화끈한 러브스토리를 만들려는 목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재벌 2세를 등장시킨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런 맥락에서, 필자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재벌 2세의 등장 자체가 아니라, 그 재벌 2세가 그려지는 방식이다. 깨놓고 말해서, 돈만 많기도 어려운데 뭘 그렇게 잘 생기기까지 했나. 뉴스나 신문을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재벌 2세, 3세 아저씨들 중 그리 잘 생긴 분은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하긴 뭐 좋다. 어차피 매스컴에 오르내리지 않는 재벌 2세들도 많이 있을테니 잘 생긴 것까진 그렇다 치자.
게다가 일편단심 한 여자밖에 모르는 순정까지! 몇백억원의 재산에, 초미남에, 순정. 이쯤 되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이랑 연애하는 게 더 리얼리티가 있겠다. 남자들이 순진하면서도 섹시하고 청초하면서도 능력까지 있는 (<오 나의 여신님!>의 베르단디 같은) 여성상을 바랄 때 여자들이 느끼는 어이없는 심정을, 아마 남자들도 똑같이 느끼면서 분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 <내 이름은 김삼순>을 보면, 그 외계인 같던 삼식이가 적어도 양다리를 걸치면서, 최소한의 리얼리티가 확보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다. 상당히 많은 여성팬들이 삼식이의 양다리에 분개하고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하지원이 양다리를 걸칠 때, 여자들은 항상 인형처럼 그려지던 여주인공 캐릭터의 심리를 파고들었다며 좋아하지 않았던가. 뭐, 양다리를 옹호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자들이 어이없는 여성상을 요구할 때 분개하는 만큼이나, 여자들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남성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로 그런 자성이 없이는, 남자들과 여자들의 이상은 끊임없이 평행선을 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현정/ 드라마몹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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