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7.27 17:08
수정 : 2005.08.03 19:56
박현정의TV속으로
미국의 유명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퀴어 아이>. 각 분야 전문가인 게이들이 ‘스트레이트(이성애자)’ 남성의 스타일을 바꿔주는 프로인데, 재미있지만 불편한 구석도 많다.
의뢰인들은 대부분 부유하지 않은 이들이지만, 컨설팅하는 쪽은 유명브랜드 디자이너에, 인테리어업체 대표 등 자본주의를 최상으로 누리는 이들이다. 이들이 의뢰인에게 “이 옷은 개나 줘요”라거나 집과 가구를 “테러블”하다며 낄낄대면, 자연스레 가난이 웃음거리가 되는 계급적 구도가 느껴져 불편해진다.
그런데 또 계속 보다 보면, 이 ‘수혜’를 받는 의뢰인들이 그런 말에 별 기죽지 않는 것도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남자가 피부 관리라니 우습다”며 성적 소수자들의 취향이라는 듯 빈정대기도 한다. 비록 공짜로 인테리어에 옷장 속까지 100% 바꿔주는 혜택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이처럼 관계가 대등하거나 적어도 대등한 척하기 때문에, 이 프로는 순수한 오락프로다. 방송이 가난을 구제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취향을 개선해주는 문제일 뿐이니까. 딱 미국인들이 오락으로 즐기기에 부담 없는 수위다.
하지만 우리는 정서가 다르다. 굶는 사람도 많은데, 먹고 살만한 애들한테 취향 타령하며 퍼주는 콘셉트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 프로에는 주로 극빈층의 사연이 나오고, 일생을 바꿀 기회가 주어지며(각막이라거나 일자리라거나 집 등), 엔딩에선 모든 출연자와 시청자들이 눈물을 흘린다. 그것은 감동적이다.
그러나 울고 난 뒤 우울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첫째 이유는 방송에 뽑히지 못한 수만 명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울고 있으리라는 사실 때문이고, 둘째는 어쩌면 나 자신이 그들의 고통을 소재로 일종의 감동적인 ‘오락’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탓이다. 문화방송 <느낌표>의 ‘눈을 떠요’라는 꼭지에서 드디어 아이가 눈을 뜨고 온 가족이 울며 제작진에게 감사할 때, 이미 훌쩍거리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드라마보다 강렬한 감동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지만, 이내 복잡한 마음이 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국가적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으면 수많은 ‘재호’들은 방송에 뽑히기만 목놓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까지 방송이 책임질 수 없다. 하지만 일전의 <꿈의 피라미드> 같은 프로는 열린 취업을 모토로 출연자들을 경쟁시켜 일자리를 주었다. 탈락한 경쟁자들은 목놓아 울었고, 청년실업의 구조적 모순이 개인의 열정문제로 기묘하게 왜곡되는 현장이었다. 이럴 바에야 적어도 오락으로 끝나는 <퀴어아이>가 더 건전하다.
그럼에도 쿨하지 않을지언정 타인의 고통에 같이 우는 우리의 정서는 분명 커다란 에너지다. 이를 개인의 구제 차원이 아닌 시스템 차원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다만 그걸 위해선 이 프로의 감동이 감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을 개선하려는 일종의 정치적 행위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전제를 인식해야만 한다. 드라마몹 에디터 박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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